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9:24 (금)

본문영역

  • 인물
  • 입력 2023.08.31 17:25
  • 호수 853

[출향인 인터뷰(8) - 정재왈 전 (재)서울예술단 예술감독]
“가장 힘들 때 고향을 찾게 되더군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간지 문화전문기자에서 최연소 정부 산하기관장까지
정치권의 바람 휘말려 희생되기도, “오히려 고향의 소중함 다시 깨달아”

 

역대 최연소 정부 산하 기관장, 탄탄대로 달려온 젊은 문예인. 정재왈 전 (재)서울예술단 감독을 대표하는 호칭은 많다. 그는 1990년 언론계와 예술계에서 10여년 이상 일하다 변화를 필요했던 (재)서울예술단의 최연소 이사장 겸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정치권의 ‘바람’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후 그로인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일은 여전히 많다며 다시 문화예술계로 돌아왔다.

정재왈 전 감독은 1964년 정미면 수당리에서 태어났다. 평생 농사에만 전념해온 아버지(故 정복환)와 어머니(故 박주연) 사이의 7남매 중 막내였다.

“큰 형님(정재능)이 군청 공무원으로 퇴임하셨습니다. 저보단 형님을 아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막내였던 그는 공부를 잘했었다. 스스로 노력한 면도 없지 않았다. 호서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엔 자연스레 또래보다 더 높은 곳을 지향하게 되었다.

“서울대를 꼭 들어가고 싶었어요. 지금도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실 걸요. 1982년 학력고사가 무척 어렵게 출제됐습니다. 덕분에 제가 원했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1년 재수를 선택했습니다.”

두번째 시도 역시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래도 내노라하는 서울 명문대학 중 하나에 입학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것이 아닐까.

그에게 다가왔던 ‘천붕지탄’

천붕지탄(天崩之嘆).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을 뜻하는 사자성어인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뜻이다. 그가 아직까지 기억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은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였다.

7남매의 막내였던 그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의 부친은 이미 환갑이 넘었었다. 그래도 ‘막내 대학졸업까지는 부모가 책임져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부친이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로 바쁜 시기였죠. 하숙집과 도서관만 다니며 살던 저였는데 도서관에 가서도 늘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했어요. 친구들도 제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1989년에 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밭 한가운데 있던 전신주의 전기에 감전돼 돌아가신 겁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기에 당진 집에서 하숙집에 연락해 메모를 제가 늘 있던 도서관 자리에 붙여놓았던 겁니다. 그렇게 제 든든한 후원자이셨고 믿었던 아버지의 비보를 메모로 전해들었던 그 순간의 아픔이 아직까지 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아버지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아들이 저입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슬픔에 젖어 살았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헤매야 했다. 1년여를 보내서야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언론인의 길

“영문과를 나온 제가 언론인의 길을 갈지는 몰랐죠. 그런데 해보니 오히려 제 적성에 맞더라고요.”

1990년 격동의 시기 끝에서 그는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이어 1992년부터 문화전문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연, 영화, 연극, 출판 등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활동했다. 1995년 당시 다른 일간지들에 비해 다소 처져 있던 중앙일보가 사장이 바뀜과 동시에 여러 가지 시도를 시작했다. ‘전문기자 도입’도 그 중 하나. 중앙일보 ‘정재왈 문화전문기자’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기자에서 문화예술인으로 뛰어들어

(재)서울예술단은 1986년과 88년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치를 때 만들어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단이다. 한국을 찾는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예술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공립의 한계는 곧 찾아왔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대중의 문화예술 욕구와 취향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반해 서울예술단은 그에 발맞추지 못한 것이다. 당시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예산낭비의 대표 사례로 꼽히며 폐지까지 거론됐던 서울예술단에 변화를 이끌 인물로 그를 낙점했다.

정치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던 그는 주어진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서울예술단은 정 전 감독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서울예술단이 가야할 길로 ‘뮤지컬’을 선택했습니다. 대중의 원하는 문화는 어려운 오페라보다 뮤지컬이라고 판단했죠. 영화화된 소재의 뮤지컬화를 시도했습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2006년 ‘고구려’ 열풍을 불러온 ‘바람의 나라’는 뮤지컬화된 후 다시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고 이준익 감독의 ‘왕의남자’를 뮤지컬로 만든 ‘공길전’은 장기상영에 돌입하는 등 호평이 이어졌다.

비정치인, 정치권의 ‘바람’에 희생돼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후 산하 기관장을 물갈이한다며 폭풍이 몰아쳤었다. 기자가 되어서도 문화부에서만 일했고 ‘현장에서 문예인들과 일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택한 길에서도 그는 정치와는 무관했다. 그러나 정치는 그를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86세대의 중심이 저였죠. 당시 정치성향이 어떻든 386세대의 연령대는 함께 묶여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 정권에서 역대 최연소 산하 기관장이었으니 정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저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문예인 출신인 유인촌 장관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만해도 기대가 컸었다. 나름 친분도 있고 자신을 잘 알 것이라고 여겼던 유 장관이 그의 자리를 위협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컸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 삶은 ‘탄탄대로’였다고 봐도 무방하겠더군요.  그 탄탄대로에 제동이 걸린 것이 그때였죠. 그 시간이 제게 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젠 가정과 친구들, 그리고 고향까지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배신감과 울분을 간직한 채 물러서야만 했던 그는 1년여 시간 동안 대학원 공부와 평론가 활동을 해왔다. 그의 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진정성을 알고 있는 문화예술계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올해 3월에 출범한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의 이사장을 맡긴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시 자신의 있어야할 문화예술인의 자리로 돌아왔다.

정 전 감독은 “제가 힘들게 방황할 때 고향의 따뜻함과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됐다”며 “이제야말로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여겼다”고 말한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당진지역의 문화예술계 발전과 인프라 구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것.

“그동안 지인들은 물론 향우 모임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당진시대’를 통해 지역을 다시 잘 알게 되었습니다. 기고도 하고 기관과 문화관련 단체들의 자문도 해주면서 말이죠.”

■정재왈 약력

-정미면 수당리 출생(1964년)

-호서고(9회)-고려대

-한국일보 스포츠문화부국 기자(1990-1995)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1995-2003)

-LG연암문화재단 LG아트센터 기획운영총괄부장(2003년-2005년)

-(재)서울예술단 이사장 겸 예술감독(2006년-2008년)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장(2011-현재)

 

김기연 기자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