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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6 송악읍 복운3리 “이주단지 새로운 명칭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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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분구로 새로 생긴 마을
각지에서 온 이들이 만든 새로운‘공동체’
젊은 인구 많아 활력 넘치는 동네

 

<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인 마을 등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질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존재한다. 마을의 전설과 옛 지명,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환경, 열녀문·효자비 등 다양한 마을의 이야기와 마을이 가진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  이 기사는 2023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송악읍 복운3리 경로당 회원들
송악읍 복운3리 경로당 회원들

 

송악읍 복운3리, 사람들은 이곳을 ‘이주단지’라고 부른다. 앞까지 바다가 들어왔던 곳에 땅이 매립되고,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기업체가 들어섰고,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그렇게 그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신도시가 조성됐다.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이제는 이곳에 터전을 잡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달리,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은 활력이 넘치는 ‘젊은’ 동네다. 

2009년, 복운3리로 분구

송악읍 ‘복운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복포리(伏浦里)와 상운리(上雲里)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복운리(伏雲里)로 이름 지어졌다. 복운리는 원래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다. 리아스식 해안선을 이뤄 갯벌이 많았다. 덕분에 해산물이 풍부했고 대부분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1950년대부터 간척 사업이 시작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진 염전, 광양 염전 등 염전에서 소금이 나던 동네가 복운리였다. 당시 한진의 염전 터는 부곡공단의 주민을 이주시켜 2005년부터 새로운 도시가 조성됐다. 이 도시가 바로 복운3리다.

송악읍 복운3리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09년이다. 복운1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민들이 늘어나자 복운1리가 1리와 3리로 나눠졌다. 

본래부터 당진에서 살아 온 토박이도 많지만,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복운3리 경로당 역시 약 25명이 회원이 있지만 이 중에서 토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3명 정도에 불과하단다. 

하지만 이곳에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됐다. ‘이주단지’라는 단어가 이미 희미해졌을 정도로 이주가 아닌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터를 잡아 살아가고 있다. 공동체를 만들고, 활력이 넘치는 마을로 가꿔가고 있다. 

복운3리는 다른 농촌 마을과 달리 젊은 인구의 비중이 높다. 신성 미소지움 아파트나 동광 아파트 등이 있어, 젊은 인구가 많고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도 많다. 아이의 울음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당진의 몇 안 되는 읍·면 단위 도시다.

 

“새 지붕 보듯 아파트 지붕만 보면 설레요”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하나가 되기까지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복운3리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인옥 노인회 간사는 그때를 회상했다. 이 간사는 제철소 발령을 받은 아들을 보러 왔다가 당시 개발되고 있는 복운3리를 보고 땅을 매입했다. 처음엔 이곳에서 오래 거주할 생각은 없었단다. 하지만 이제는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남편(조완호 현 노인회 이장)의 말에 따라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처음 복운3리를 왔을 때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어요. 원룸 몇 개가 고작이었죠. 서울에서 살 때는 수영이나 탭댄스 등을 배우기도 했는데, 여기는 이런 수업을 들을 곳도 없었어요. 처음 몇 년 동안은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서울에 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점점 이곳도 정이 들더라고요. 기지시줄다리기 해오름 풍물단에서 총무도 하고, 복운3리 노인회도 만들어지면서 이제 이곳이 제2의 고향이 됐어요.”

비슷한 시기에 온 이애순 전 총무도 마찬가지였다고. 우연히 찾은 당진이 마음에 들어 노후에 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단다. 그는 “2006년 즈음에 왔는데, 그때는 도시가 개발 중이어서 그늘조차 없어 쉴 곳도 없었다”며 “이곳에서 할 게 없어 원래 살던 안산을 왔다갔다 하면서 생활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는 아파트 입주도 되기 전이라서 몇 개 있는 원룸이 전부였다”며 “매번 공사를 하고 있어 시끄럽고 원룸 단지에 쓰레기로 가득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문화시설도 많이 생기고 좋은 주민도 많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주민?! 우리에겐 제2의 고향!

복운3리 노인회만 봐도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왔다. 신양수 부회장도 부천에서 오래 살다,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수도권과 가까운 이곳을 찾게 됐다. 김문수 씨는 지난 20여 년 전 일을 하기 위해 당진을 찾았다가 이곳에 남게 되었다고. 이지영 씨 역시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충주에서 이곳을 찾았다. 그치만 누구보다도 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이주단지’라고 해서 잠시 살다가 떠날 사람들이 아닌,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신분교 씨는 낚시를 좋아하는 아들 따라 당진을 오게 됐다. 처음에 1년 살다가 떠났고, 다시 와서 2년 살다가 떠났다. 하지만 늘 이곳이 생각났고 그리웠다. 한 달에 한 번은 경로당에 오기 위해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을 정도다. 

복운3리 경로당에서는 난타를 배울 수 있다. 난타팀이 구성돼 있어 매주 연습하고 지역의 각종 무대에 오른다. 실력도 수준급이다. 신분교 씨 역시 난타팀에 속해 있다. 당진을 떠났어도 팀원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었던 그는, 공연 막바지에 이를 무렵엔 복운3리에 방을 구해 연습할 정도였단다. 그는 “아무 것도 없었던 동네인데도 정이 들었는지, 당진을 처음 떠날 때 눈물을 흘렸다”며 “서울에서 버스 타고 복운3리 신성 미소지움 아파트 둥지만 봐도 마치 새가 자기 지붕보고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처럼 좋았다”고 말했다. 

복운3리 경로당 위치(출처 : 네이버지도)
복운3리 경로당 위치(출처 : 네이버지도)

 

“복운3리 제 이름 찾았으면”

주민들의 바람이 있다면 이제 복운3리가 제 이름을 찾는 것이다. 낯선 느낌의 ‘이주단지’가 아닌 복운3리 혹은 송악신도시로 불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문수 씨는 “잠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주단지’인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며 “당진버스 터미널에 아직도 ‘이주단지’라고 표시돼 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곳이 새로운 이름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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