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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야기 2] 정미면 수당리, 천년 역사 간직한 안국사지 품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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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이었다가 1957년에 당진으로 편입
함평정씨 집성촌…“주민 화합·단합 최고”

 

<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인 마을 등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질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존재한다. 마을의 전설과 옛 지명, 보호수를 비롯한 자연화경, 열녀문·효자비 등 다양한 마을의 이야기와 마을이 가진 자원을 발굴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 이 기사는 2023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마을 사랑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수당리 주민들
우리마을 사랑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수당리 주민들

 

정미면 수당리는 ‘숯골’과 ‘원당골’에서 한 글자씩 글자를 따서 이름 지어진 마을이다.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굽는 마을이라 하여 숯골[炭洞]의 ‘숯’ 음을 수(壽)자로 대체하고, 또 다른 자연부락 이름인 원당골[員堂洞]의 당(堂)자를 따서 수당리(壽堂里)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원래는 해미군 일도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동(壽洞)과 안국동(安國洞)의 일부를 병합해 수동과 안국동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수국리로 이름 붙여지며 정미면에 편입됐다. 그 후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6호에 의해 정미면이 서산군에서 당진군으로 편입되면서 당진에 속한 마을이 됐고, 1971년 숯골과 원당골에서 다시 한 글자를 따서 수당리라 이름이 바뀌었다. 

정재현 전 노인회장은 “옛날에 수당리 주민들은 서산사람이었다”며 “운산과 가까워 주민들이 운산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수당리 내 11개 자연부락 위치

수당리 마을회관 입구에 위치한 마을 표지석. 비석 뒷면에 마을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수당리 마을회관 입구에 위치한 마을 표지석. 비석 뒷면에 마을의 유래가 기록돼 있다.

 

수당리의 자연부락은 11개다. 아랫말은 마을이 아래 지역에 있는 마을로 ‘아랫말’이라 불렀다. 숫골은 참나무가 많아 사방에 숯가마가 있어 숯골이라 불리다가 숙골이라고 불리게 됐다. 원당골은 원당이 있던 골이라 ‘원당골’이라 불렸다. 

안국사지에 위치한 석조여래삼존입상
안국사지에 위치한 석조여래삼존입상

 

안국은 보물 제100호인 안국사지 석조여래 삼존입상과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지 석탑이 위치해 있다. 또 일명 배바위로 불리는 매향비바위(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 안국사지 매향암각)가 있다. 역사가 깊은 이곳은 주민들과 인근 학교에 다닌 학생들의 대표적인 소풍장소였다. 

정재현 이장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일제 말에 우마차와 인력을 동원해 안국사지 석불을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마을회관 앞까지 가져왔는데, 일제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포기했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곤남이골은 경사도가 심하여 벽과 같은 고개를 넘는 곳이라 하여 ‘곧너미골’이 변한 것이며, 송생이골, 봉이골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중간말은 윗숫골 아래 펼쳐진 마을로 토질이 비옥해 밭농사가 잘되는 곳이다. 호구마루는 부락 하부 대운산리 가지막과 인접된 곳이다. 

의정골은 방죽골 밑에 있는 조그마한 골이며, 방죽골은 옛날에 큰 방죽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큰목골은 안국사 입구에 펼쳐진 깊은골을 말한다. 또한 갈티골은 매방리로 넘어가는 수당리재 밑에 깔려 있는 곳이다. 

함평정씨 면천공파 집성촌

수당리에는 함평정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함평정씨가 수당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450년 정도 된다고 한다. 현재 수당리에 살고 있는 100여 가구 중 50여 가구가 함평정 씨일 정도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수당리에 거주하는 함평정씨를 면천공파라고 한다. 면천군수로 온 정효창에 의한 것인데, 수당리의 정씨 문중에서 정효창의 5세손인 정암(鄭巖)을 수당리 함평정씨의 파조로 보고 있다.

수당리 함평정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제국 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대학자였던 정재학과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수당리 봉화시위를 이끌었던 정원환을 꼽을 수 있다. 방재 정재학은 일제치하에서도 퇴락하는 전통예절의 수호와 전승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수당리에 서당을 세워 많은 후학을 양성하며 선비의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2016년 12월 수당리 마을회관 앞에 정재학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문중에서는 한학자 정재학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사를 올려왔다.

또한 정원환은 수당리 봉화산에 불을 붙이고 기미독립만세운동 당시 봉화시위를 이끌었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발원한 4.4만세운동은 며칠 간 계속 이어졌는데, 4월 8일 저녁,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뒤 조금리에 이어 정미면 신시리를 거쳐 밤 10시경, 약 300명의 주민이 수당리의 봉화산 봉화대에 올라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본지 제1445호 ‘[3.1운동 104주년 특집 특별기고 2] 당진인의 문중의식과 독립정신’ 참조> 

 

수당리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 꽃을 심어 아름다운 마을로 가꾸고 있다.
수당리 주민들이 마을 곳곳에 꽃을 심어 아름다운 마을로 가꾸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철탑 없는 살기 좋은 마을 

정재현 이장은 “수당리는 철탑이 지나가지 않는 마을로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며 “최근 10년 간 귀농·귀촌인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민들이 단합도 잘 된다”며 “지난 4월 노인회 주관으로 청와대 야유회를 다녀왔고, 우리마을 사랑운동에도 많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고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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