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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3 19:51
  • 수정 2023.12.06 11:16
  • 호수 1478

[잊혀진 영웅, 어느 참전용사의 일기⑥ 마지막회]
최상렬 옹(93·대호지면 사성리)
“전쟁 터졌단 소식에 헤엄쳐서라도 고향 가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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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군 입대…논산훈련소 1기로 들어가
강원도 양구의 문서취급소 소장으로 5년 복무
전역 후 돌아온 동네서 잃어버린 땅 찾는데 노력

 

<편집자주>

70년 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우고 고향으로 귀환한 당진의 참전유공자들. 1950년 전쟁 당시 스무 살 무렵이었던 참전용사들의 나이는 이제 아흔이 넘었다. 나라를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들의 희생도 점점 잊히고 있다. 2500여 명이었던 당진 참전용사 중 2200여 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의 끝자락에서 회고하는 전쟁의 참상을 기사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한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를 통해 추천받은 6명의 참전용사의 삶을 오는 11월까지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 미디어 지원 사업을 통해 취재·보도합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포탄이 빗발쳤을 때, 그 탄에 목숨을 잃는 전우들을 볼 때 최상열 어르신은 헤엄쳐서라도 고향을 가고 싶었단다. 무장한 상대 군을 마주했을 때도 그저 눈물뿐이었다고. 아무리 애써도 흐려지지 않는 것이 고향의 그리움이었다. 가족을 만나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살아야만 했다. 70년도 더 된 오래 묵은 그날의 기억을 하나씩 최 옹이 꺼내놓았다.

옥편 찾아가며 글 공부 

최상렬(93) 옹은 1932년 지금 살고 있는 대호지면 사성리에서 태어났다. 농사 짓는 부모님을 둔 그의 유년시절은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시절이 그랬듯, 최 옹 역시 국민학교를 끝으로 이후 배움의 끈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혼자 신문을 읽다가 모르는 글이 나오면 두터운 옥편한자(사전)을 꺼내 찾아가며 공부했다. 그렇게 배운 한자와 글이 군에 들어가서도 꽤 쓰임새 있었다. 그는 “옥편 찾아가며 혼자 글을 배웠다”며 “지금도 제사 지낼 때 축문 읽을 만큼 건강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보단 편하게 군 생활해”

최 옹은 19살의 나이에 일찍이 군에 발을 들였다. 논산훈련소가 처음 창설됐을 때, 최 옹이 1기생으로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춘천보충대에 잠시 있다가 강원도 양구에서 본격적인 군 생활을 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최 옹은 문서취급소 소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연락병 두 명에 지프차 한 대를 보유한 문서취급소 소장을 맡았다”며 “다른 사람들보다 군 생활을 편하게 했다”고 말했다. 

“한문 알거든 문서취급소에서 일 하라고 하더라고요. 문서취급소에서는 편지나 공문을 상부로 올려 보내는 일을 했어요. 연락병이 지프차 타고 다니면서 짐을 실어 날렀어요. 또 편지가 오면 이름 읽을 수 있으니 알려도 주고요.”

 

“시체 쌓아 올리는 모습 보고 눈물만 나”

강원도 양구에서 문서취급소장으로 약 5년 동안 생활했다. 최 옹은 군 복무 중 고마웠던 사람으로 ‘온양온천의 남상철’ 씨를 기억해냈다. 군 생활 중에 결혼도 했다. 잠시 휴가를 나왔을 때 중매로 아내(故 전석렬)를 만났고 그렇게 혼인을 했다. 아내는 최 옹과 평생을 함께 하다 올해 초,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군 생활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최 옹은 그때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군 생활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지금과 달리 옛 대호지는 다 바다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꽃게에 망둥이며 물고기 잡아 생활했죠. 헤엄도 잘 쳤고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헤엄쳐서라도 고향에 가야 하나 싶었어요. 전쟁 중에 전우들이 죽으면 그냥 시체를 트럭에 장작 싣듯이 쌓아 올리는 걸 봤어요. 무서웠죠. 눈물만 났고요.” 

 

“우리 동네 찾아야죠”

어린 나이에 입대해 전쟁을 겪은 그는 5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그는 “진급하면 전역 안 시켜 준다고 해서 진급도 안 했다”고 말했다. 군 생활을 마친 후 최 옹은 바로 당진으로 내려왔다. 처음엔 농사 일을 시작했고 그 후에는 마을 수리계장으로 22년을 지냈다. 마을 일도 열심히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에게 빼앗긴 마을 땅을 찾는 데도 열을 다했다. 아직도 그때 당시의 일이 또렷하게 생각난다고. 그는 “사성리와 조금리, 적서리에 있던 60정보의 땅을 빼앗겼다”며 “그때 서울의 주민법인청산사무국을 찾아가면서 땅 찾는 데 노력했고 결국 되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법인청산사무국 가는 길에 한강을 지나는 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요. 그냥 울면서 돌아 다녔어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움직여서 겨우 땅을 찾았어요.”

 

아직도 고추·깨 농사 지으며 밭일 하기도

휴전은 됐지만, 전쟁의 잔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겨우 마을 땅을 되찾은 최 옹은 전쟁 때도 그렇게 그리웠던 고향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올해로 93세지만 아직도 정정하다. 지금도 밭에 나가 일을 하곤 한다. 그는 “고추나 깨, 콩을 심고 있다”며 “그 외에는 집 앞 바위에 앉아 주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도 참전유공자를 나라에서 인정해주고, 지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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