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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24.01.05 21:08
  • 호수 1487

[당진문화재단 영상기록, 당진의 예술인 1] 양기철 성악가
불모지인 당진에 심은 예술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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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교사에서 교사 그리고 오페라단장까지
“판소리와 오페라 더한‘판페라’세상에 울렸으면”

편집자주

당진문화재단에서 예술인 영상기록 사업으로 지난해 △양기철 △김윤숙 △나동수 예술인의 삶을 영상으로 담았다. 평생을 예술에 헌신하며 삶을 바쳐온 이들의 이야기는 당진문화재단 유튜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당진시대에서도 이들의 삶을 기록해본다.

 

 

바리톤 양기철 성악가는 오페라단 창단부터 창작 뮤지컬 제작까지, 예술의 불모지였던 당진 음악계에 소중한 씨앗을 심었다. 그 씨앗이 자라 지금 싹들이 퍼지고 있다. 예술인의 꿈과 기쁨을 나누고 함께 노래하는 삶을 살아 온 양기철 성악가. 그는 고향인 당진을 음악이 있는 도시, 예술이 숨 쉬는 당진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이루지 못한, 우리의 것을 담은 판페라(판소리+오페라)가 세계 무대에 오르는 그 모습을 양기철 성악가는 꿈꾼다.

아버지에게 받은 음악적 영향

양 성악가는 1947년 당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음악의 길을 걷는 데 있어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음악 교사였던 아버지였다. 당시 아버지는 당진에서 유일하게 발로 페달을 밟고 바람을 불어 넣어 풍금을 연주할 수 있었다. 운동회의 흥을 올리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연주가 필요했단다. 그래서 운동회 날짜를 다르게 잡았을 정도였다고. 아버지의 연주 소리를 더 크게 퍼질 수 있도록 마이크를 잡는 일은 꼬마였던 양 성악가의 일이었다. 그는 “5살부터 9살까지 아버지의 풍금 연주를 들으며 음악을 배웠다”고 말했다.

 

차가운 물에 발 담그며 피아노 연습

양 성악가의 꿈은 애초 음악가가 아닌 아나운서였다. 아나운서의 꿈을 품고 서울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한 차례 낙방했다. 그렇게 공부에 전념하며 재수한 끝에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꿈을 향해 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 단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아버지가 당진에서 대전에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됐고, 당진 본가부터 대전까지 살림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에 서울 공부는 포기해야만 했다. 대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 권유로 목원대 음악교육과에 입학해 피아노를 배웠다.

포기하지 못했던 아나운서의 꿈

피아노를 전공하면서도 아나운서의 꿈은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대학 졸업할 즈음인 1973년, KBS에서 아나운서를 공개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 양 성악가는 시험 준비에 바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1차와 2차, 3차까지 시험에 통과했지만 아쉽게도 최종 합격하진 못했다.

그제야 아나운서의 꿈을 내려놓은 양 성악가는 아버지처럼 음악 교사로 교단에 섰다. 1979년 6월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양기철 성악가는 성악가로서 첫 독창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4년 11월까지 총 9차례의 독창회를 열었다. 그때만 해도 ‘테너’ 양기철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음악 연수를 받으면서 음역대가 바뀌었고 그 후 ‘바리톤’ 양기철이 됐다. 

 

인생의 공백기를 만나다

교편을 잡고 있던 1989년 11월, 대전시민회관에서 충청오페라단 창단을 위한 오페라 하이라이트 공연이 열렸다. 그때 진행한 공연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이 무대가 끝나고 충청오페라단 출범 준비위원장이었던 양 성악가가 단장을 맡게 된다. 

오페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무대예술이다. 오페라를 무대에 한 편 올리는 데도 큰 비용이 들었다. 적자가 크지만 양 성악가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된 고비가 찾아왔다. 대학의 전임 교수 내정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고교의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교수 임용이 없던 일이 되면서 인생의 공백기가 찾아온 것이다. 양 성악가는 남은 퇴직금을 모아 지하실에 연습실을 만들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오페라단 등을 창단했다. 그렇게 2년을 꼬박 운영하니 남은 돈은 모두 바닥을 보였다. 

 

200회 넘는 공연 이어와

1989년 충청오페라단 창단 이후 오페라 제작과 함께 200회가 넘는 공연을 이어왔다. 1991년에는 대전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오페라 <돈 죠반니>를 선보였다. 대전을 기반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왔던 그는 신성대학교 교수로 부임과 함께 다시 고향 당진을 찾았다. 그의 눈에 비친 고향 당진은 중학교 때 떠났던 그때 그 모습이었다. 그는 당진도 예술을 할 수 있는 도시란 생각을 하면서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예총 당진군지부장, 한국음악협회 당진군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문화단체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3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당진군립합창단과 무용단은 창립했으며 충남문화재단, 당진문화재단 창립하는 과정에도 노력을 더했다.

 

가족의 사랑과 헌신

공연 실적만큼 경제적이 어려움이 쌓였다. 그 고비마다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름아닌 가족이었다. 묵묵히 뒤에서 지지해주면서 함께 위기를 넘어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 송정빈 씨가 지난해 7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그는 “구룡리 집 마당에 나무 아래 의자가 아내가 시 쓰는 곳”이라며 “그곳에 가기만 하면 눈물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하루에도 두 번 울곤 했다”고 슬픈 마음을 전했다.

 

“세계 무대에 판페라 올랐으면”

2014는 양 성악가는 독창회를 끝으로 무대에 내려왔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후에 그는 구룡리의 고향집 한쪽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그동안 활동했던 자료와 간이 무대가 설치돼 있다. 그는 “20년 음악 생활을 하다 보니 당진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오페라로는 외국과 견주기 어렵기에 우리의 것인 판소리를 더한 팝페라를 생각하고 무대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양 성악가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판페라로 만든 <솔뫼>를 비롯해  <성 김대건 신부>, <상록수> 등의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판페라에 창을 곁들인다면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을 것”이라며 “판페라로 두 작품만 세계에 한번 던져보고 싶은 것이 마지막 꿈”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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