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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24.01.12 18:55
  • 수정 2024.01.12 19:55
  • 호수 1488

[당진문화재단 당진 문화예술인 기록사업 2 ] 김윤숙 문인화 작가
문인화와 닮은 작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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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진학할 줄 알았던 미대, 포기하며 놓았던 그림
문화원장과 늘꿈갤러리 대표로 지역 문화예술의 길 열어

<편집자주>

당진문화재단에서 예술인 영상기록 사업으로 지난해 △양기철 △김윤숙 △나동수 예술인의 삶을 영상으로 담았다. 평생을 예술에 헌신하며 삶을 바쳐온 이들의 이야기는 당진문화재단 유튜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당진시대에서도 이들의 삶을 기록해본다.

 

 

화가 김윤숙의 삶은 그가 그려 온 문인화를 닮았다. 먹이 화선지에 번지듯 그 역시 예술인으로서의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 역시 삶이 평탄치는 않았다. 늘꿈갤러리를 개관하고, 당진문화원장이 되기까지 그리고 예술을 지금까지 이어오기까지 많은 곡절이 있었다. 

김윤숙 작가는 1958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미대 진학도 그에겐 당연했다.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병원에 있던 아버지를 만났던 그날이 김 작가의 기억에 평생 박혔다. 그날 아버지는 김 작가의 손을 꼭 잡으며 “나는 얼마 못 살고, 엄마가 혼자 너희를 챙겨야 하기에 대학을 포기해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건넸다. 김 작가는 그때 눈물만 흘릴 뿐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줄 알았다면 마음 편히 가실 수 있게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고 말할 걸 그랬다”고 잊히지 않는 그때의 슬픔을 전했다.

미대 포기 후  가장의 역할까지 맡아

결국 미대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생계를 위해 취업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군인이었던 남편을 만나 일찍이 결혼하게 된다. 시부모님과 살면서 종손 며느리 역할도 하느라 김 작가는 그림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여기에 아픈 시어머니를 병간호하느라고 더더욱 그림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들, 아픈 시어머니의 수발, 여기에 남편도 큰 수술을 하게 돼 김 작가는 가장의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때 김 작가는 아이를 키우며 아동복 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개구쟁이’ 이름으로 원아동복 장사를 했다”며 “그때 사람들에게 인사하면 ‘개구쟁이 가네~’라고 말하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렇게 10년을 개구쟁이를 운영해 왔다고. 

“그때 생각하면 힘들죠. 남편도 그때 살아오던 모습을 다 알아요. 아이들도 알고요. 그래서 지금은 엄마인 저를 인정해주고, 남편도 지지해줘요.”

삶의 전부였던 그림, 다시 시작

한때 삶의 전부였지만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림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 것은 1996년이다. 장사를 그만두고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때의 나이가 서른 초반이었다. 늦었다고 초조해할 법하지만, 그는 지금이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김 작가는 서울, 경기도, 충남 홍성 등을 곳곳을 찾아다녔다.

“새벽에 눈을 뜨면 천장이 마치 화선지로 보였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열정을 남편이 많이 알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림을 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고, 밀어줬어요.”

 

김윤숙 작가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문인화’였다. 문인화에는 채움과 비움의 미학이 있고, 단순한 붓놀림으로도 대상을 명확히 표현한다. 김 작가는 “화선지에 먹이 번지는 느낌이 좋아 문인화 매력에 빠졌다”며 “문인화에 대한 사랑은 그때부터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고 애정을 가득 보였다. 

배움의 길이 이어지다

김윤숙 작가의 화실에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2008년 창립전을 시작으로 16년째 이어지는 먹그림 사랑회도 그중 하나다. 다들 나이, 직업 모두 다르지만 먹의 매력에 매료돼 있다. 먹그림에 대한 사랑 곁에 김 작가가 항상 있었다. 

김 작가는 수강생에게 공모전 도전을 독려해 왔다. 그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열정으로 수강생을 지도하고, 자신의 작품을 준비하던 중 급성 목디스크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목디스크로 당장 입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림을 못그린다는 말도 들었다”며 “그 소리를 들었어도 국전을 준비했고, 결국 작품을 출품하고 바로 급성 목디스크가 찾아와 수술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전은 특전을 받으면 직접 대회장에 참여해 휘호를 새겨야 한다”며 “포기할 수 없어서 수술한 다음날 피주머니를 차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대회장에 찾아 간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배신하지 않는 노력

이러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2003년 수선화 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문인화 부문 우수상, 현대여성 미술대전 한국화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국전 작가로 입지를 굳혔고 동시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충남 미술대전 초대작가로서 운영위원과 심사를 맡아 입지를 단단히 다져왔다. 

“지도 자격을 갖추려면 대학 혹은 국전 작가 중 두 길을 선택해야 했어요. 저는 늦게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서 국전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국전에 도전했고 입선부터 특선까지 차례로 수상하면서 문인화 최고상까지 받았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2022년 4월, 당진문화원장 선거에 당선되며 제12대 당진문화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현장 예술가의 삶을 넘어 당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장으로 봉사하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에 보람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딸 차은지 씨는 “엄마가 항상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이야기한다”며 “항상 어떤 일을 해도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에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전히 배우고, 변화를 즐기는 김윤숙 작가. 그의 노력은 작품에서 더욱 빛이난다. 늘 꿈꾸는 삶을 살아가는 늘꿈 작가 김윤숙의 도전은 오늘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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