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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08 20:35
  • 수정 2024.03.13 10:30
  • 호수 1496

“섬 아이들의 반짝이던 눈빛…여전히 생생해”
[행담도 사람들]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에서 재직한 김명중 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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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년에 걸쳐 행담분교서 재직…“그립고 또 그리운 행담도”
35년 만에 만난 행담도 주민과 제자들…“이산가족 만난 것 같아”

과거 행담도에 살았던 이익주(왼) 씨와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 교사였던 김명중(오른) 씨가 지난 2일 행담도에서 만났다.
과거 행담도에 살았던 이익주(왼) 씨와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 교사였던 김명중(오른) 씨가 지난 2일 행담도에서 만났다.

 

지금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서해대교 아래 휴게소가 있는 행담도지만, 앞서 행담도는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척박했지만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아이들이 뛰놀던 여느 동네와 같았다. 

뱃길로만 닿을 수 있었던 행담도는 2000년 서해안고속도로 노선이 지나는 서해대교가 개통되며 육로로 갈 수 있는 곳이 됐다. 개발의 이면에는 실향(失鄕)이 남았다. 땅이 넘어갈 때까지 개발된다는 소식도 몰랐던 주민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결국 현재는 휴게소로 변했지만 쓸쓸히 고향을 뒤로 했어야 했던 이들이 최근 모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행담향우회’가 창립하고 당진시가 행담도의 모든 것을 담은 <그-곳에 사람이 살았네>를 발간될 예정이다. 잊혀질 뻔했던 행담도의 사람들의 흔적이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행담도 휴게소 한 편에 전시관을 마련했으며, 향후 역사관 건립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 1일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행담도에서 교직 생활을 했던 김명중 씨다. 오랜만에 보는 제자(이익주 씨)를 조우한 것도 큰 기쁨이지만, 지난해 행담향우회 창립총회 이후 다시 오지 못할 것 같았던 행담도를 찾은 것도 반가움이 큰 듯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한정초등학교 행담분교의 모습이 담긴 옛 사진도 꺼냈다.  

 

“처음 가던 날 아이들이 마중나왔어요” 

김명중 씨는 지난 1970년부터 1972년 초까지 2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2년을 행담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의 나이가 각각 34세, 45세 되던 해였다. 50여 년도 더 지났지만 몇몇의 기억은 또렷하기만 하다.

충남 금산군 서대산 밑에서 태어난 김 씨는 바다 구경이 쉽지 않았다. 당진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바다로 둘러싸인 행담분교가 마음에 들었단다. 처음에는 오지라는 생각에 행담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사는 아이들의 행색을 상상해보면 남루할 것만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섬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김 씨는 “선생님이 섬에 온다고 아이들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다”며 “행담도에 사는 아이들이 육지에 사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옷도 더 잘 입고 있었고, 신발도 내 것보다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또 얼굴이 불그스름하니, 이 아이들이 집집마다 보배구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학생들도 그렇지만 오고 가는 길주민들을 만날 때면 조금 보태서 저를 하느님처럼 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주민들과 아이들 모습을 보고 ‘이 애들이 정말 보배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잘 가르쳐야겠다’ 생각하고 다짐했죠.”<그-곳에 사람이 살았네 中>

행담도에서 신혼살이 

김 씨가 처음 행담도를 찾았을 때 그는 막 결혼한 신혼이었다. 신접살림을 행담도에 차린 것이다. 첫째 딸인 김은정 씨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첫 딸이 태어나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단다. 

그는 “아내가 아이를 행담분교 숙직실에서 낳았다”며 “오랜 시간 진통하는 것을 보고 혹시라도 아내가 잘못될까 무서워서 무작정 한진 쪽 바다로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바닷물이 허리쯤 차는 곳까지 나가서 지나가는 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며 “그렇게 육지로 나가 의사를 모셔오고, 또 행담도 동네 어르신들까지 도와줘서 아내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처가댁에서 준 쌀을 지게에 이고 열린 바닷길을 걸어서 행담도에 오기도 했단다. 그는 “행담도는 배를 타고 갈 수 있지만 가끔 물때가 잘 맞으면 갯고랑(간석지 사이에 발달해 있는 하도 형태의 유로)이 열린다”며 “갯고랑을 건넌 경험이 없어서 한 발씩 앞을 짚어 보면서 천천히 갯고랑을 건너 행담도에 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도서실 만들고 토끼 기르고 

김 교사는 행담도 아이들을 위해 작은 선물도 전했다. 분교 옆에 있던 도서실에 본교에서 얻어 온 책을 넣어 도서실을 작게 만들었고, 숙직실 뒤편 빈 터에 굴을 파서 토끼를 사다 기르기도 했다. 또 마을 공동 우물에 비닐막을 씌어 추운 겨울에 조금은 덜 어렵게 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바다로 일하러 간 주민들이 들어올 때에 맞춰 밥을 지어 놓기도 했단다. 

“두 번째 섬에 들어갈 때는 본교에 제가 가겠다고 나섰어요.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으니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주민들도 다 알고 지낸 사이였고요. 섬이라는 것이 밖에서 보면 외롭고 쓸쓸해 보여도 들어가면 또 달라요.”

바다에 고립돼 헬기로 구조

행담살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다에 고립되던 때다. 1984년 1월,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진 추위가 찾아왔다. 행담도 앞 바다가 얼어붙었을 정도다. 조수간만의 차로 얼었던 얼음이 깨지면서 집채 만한 크기로 나눠졌다. 그 속에서도 행담도 주민들은 장대를 노 삼아 음섬포구까지 오갔고, 아이들은 큰 얼음 조각을 타고 놀기도 했단다.

바다를 지나도 괜찮겠다 싶을 때 김 씨를 포함한 주민들이 얼음 사이를 헤치면서 복운리에 있는 포구로 가던 때였다. 바다 중간쯤 갔을 때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 조각들이 엉겨 붙고, 배를 감싸면서 고립된 것이다. 

복운리와 행담도 포구에 사람들이 모였다. 양쪽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방법이 없었다. 얇은 나무판으로 만든 조각배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날 무렵 그때 헬기가 와서 극적으로 구조됐다.

“여전히 설레는 ‘행담도’”

김 씨에게 있어 행담도는 여전히 설레는 곳이다. 그는 “눈 감고 행담도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설렌다”며 “보고 또 보고 싶은 그곳 덕에 수명이 이어지는구나 싶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행담향우회 창립총회에서 주민들과 제자를 만났을 때 마치 이산가족을 만난 것 같이 반가웠다”며 “나이가 있어서 또 만날 수 있을까, 행담도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김 씨는 교직 생활하면서 모은 행담도에 관련한 자료와 그날 만난 주민들의 주소록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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