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9:24 (금)

본문영역

  • 문화
  • 입력 2024.03.12 14:20
  • 호수 1496

‘남이흥 장군 탄신제’문화재청 지원받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탄신제 및 풍성한 문화제로 개최될 예정

남이흥 장군의 영정
남이흥 장군의 영정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정묘호란 때 순국한 당진시의 대표적 호국 인물인 남이흥장군의 제449주년 탄신제가 문화재청 ‘국가 유산 호국선열 기념행사 지원사업’ 공모에 선정됐다. 오는 2027년 남이흥장군 순국 400주년(정묘호란 400주년)을 앞두고 공모에 선정돼 더욱 의미가 깊다.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호국선열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조성되거나 역사적 사건·인물과 관련된 국가 유산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를 국비로 지원하는 ‘국가 유산 호국선열 기념사업’을 신규 추진하고 있다. 이번 지원 사업에 남이흥장군 탄신제를 비롯한 20건이 선정됐다.

그동안 남이흥장군 탄신제는 남이흥장군 문화제의 이름으로 별도의 제의 없이 기념식 및 부대행사만 이뤄져 온 가운데, 이번 공모사업 선정으로 남이흥 장군 탄신제를 비롯해 풍성하게 문화제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한편 당진시는 2026년까지 남이흥장군의 호연지기와 기개 등을 교육할 수 있는 체험마당을 조성할 예정이다.  

남이흥 장군은?

조선시대 무장인 남이흥 장군은 조상 대대로 무공을 세운 충신 혈통을 이어 받았다. 외모부터 비범해 어려서부터 강직한 기질이 남달랐으며 기골이 장대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남이흥의 나이 17세로, 당시 부친은 부평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부친이 왜적과 교적하는 사이 남이흥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다시 부평으로 향했는데, 도중 피난민과 함께 도적떼를 만났을 때 남이흥이 대범하게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도적떼를 호통쳐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남이흥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굳은 결심 속에 무술을 연마하기 시작, 27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지원해 급제했다. 36세 부령부사 재직 시절 병기를 정비하고 군량을 비축해 부령진이 6진 가운데 가장 튼튼한 진이 되게 했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의 장계를 통해 광해군에 전달돼 승진하고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불행하게도 화상을 입어 사직했다. 39세에 부령부사 재임 시절 치적과 외적 소탕의 공이 인정돼 가선대부에 오르고 군기시 제조를 제수 받았다. 47세에는 공홍병마절도사를 제수 받고, 재임 중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아 칭송을 받기도 했다. 이후 42세때 진주목사가 돼 진주성을 중건키도 했다.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남이흥은 도원수 장만의 지휘 아래 군사를 이끌고 무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자 인조는 특명으로 남이흥을 연안부사에 임명하였고, 남이흥은 이후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