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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1.12.10 00:00
  • 호수 379

50년 해로? 그냥 울다 웃다보니 세월가데 - 이기열, 안유순 - 송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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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혼식 올린 우강면 이기열 할아버지, 안유순 할머니

‘신랑신부 입장!’ 사회자의 선언에 뒤이어 파란색 양복을 차려입은 신랑과 곱게 화장한 신부가 함께 식장으로 들어섰다.
“새신랑이 아니라 헌신랑이네.”
“신부 얼굴에 웬 주름이 저리 많아.”
어디선가 농이 들려오자 식장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신랑신부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에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도 만면에 웃음이다.
합덕대건노인대학(학장 서금구)이 지난 8일 추수감사제를 맞아 마련한 금혼식의 주인공인 우강면 이기열(73세) 할아버지와 안유순(70세) 할머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백년가약을 맺은지 50년.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했을 오랜 시간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노부부를 우강면에서 만났다.

“신식 결혼식은 처음이여. 거울 앞에 섰는데 이게 난가 싶더라구.”
그날 일을 떠올리면 웃음부터 나온다는 안유순 할머니.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꽉 끼는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를 누가 보아서 웃지 않겠느냐며 그날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젓다가도 “신기하데. 입으면 모두 공주같은가 봐”하며 소녀처럼 들떠 하신다.
“담담했지 뭐. 당연한 것이고.” 이기열 할아버지는 표현과 말을 아끼는 평소 성품 그대로 단 몇 마디로 그날 소감을 대신한다.
노인대학 동기생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하객들 앞에서 성대한 금혼식을 올린 일에 대해 노부부는 입을 모아 “뭐라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서산시 원산면이 고향인 안 할머니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송산 삼월리가 고향인 스물 한살의 이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신랑 얼굴을 첫날밤에야 제대로 봤어. 느낌? 우리 때 그런 게 어딨어. 수줍어서 한참을 앉았다가 그냥 불끄고 첫날밤 치렀지.”
“신부한테 정 줄 시간이 있었나 뭐. 가을에 결혼하고 이듬해 봄에 전쟁 터져서 의용군으로 차출돼 갔지. 사람 죽고 총알 날라다니는데 마누라가 어딨어. 그래도 한번 생각나면 엄청 보고싶데.”
결혼한 이듬해에 전쟁이 터져 6년간의 생이별을 겪어야 했던 두사람. 안 할머니는 이 할아버지와 떨어져 살던 그때, 시집살이의 매운 맛을 처음 느꼈다.
“자식 못 낳는다고 엄청 구박당했어. 구절초니 뭐니해서 안 삶아 먹은 게 없지. 그거 먹은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처져. 동네 아낙들이 그랬다니까. 수탉 없는디 암탉이 새끼 까냐고.”
50년 전을 회상하는 가운데 안 할머니는 파안대소했다. 안 할머니는 “6년 뒤부터는 3년마다 배불러 있었다”며 “6남매 줄줄이 낳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없는 살림에 그 일도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도 제대를 못하고 강원도 철원에서 60개월을 복무했다는 이 할아버지는 가족과 헤어지고 6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없는 살림에 불어난 식솔들을 책임지기 위해 이 할아버지는 당시 한진에 있던 염전에서 일을 시작했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판자집에서 일가족이 기거해야 했던 시절, 얼어죽을 뻔한 혹한의 추위를 몇 차례나 견뎌내고서야 가까스로 돈을 모아 지금의 우강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래도 부부는 힘든 줄 모르고 지냈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속 안썩이고 훌륭하게 장성한 자식들 덕분에 가난한 시절의 아픔 같은 것은 기억도 안나.”
노부부는 말한다.

할아버지와 사는 동안 서운할 때가 없었느냐는 물음에 안 할머니는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며 “남편 무서워서 큰소리 한번 못냈었다”고 말한다. 말수 적고 여간해선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남편 때문에 속타하며 혼자 끙끙 앓는 날들이 많았지만 하늘같은 남편에게 대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았던 안 할머니다.
“새끼들 낳고 나면 도망갈 생각도 못해. 이혼이니 뭐니 하는 건 꿈도 못 꿨어. 그 집에 시집오면 그집 귀신 되는 게 당연한 사람 도리인 줄 알았지.”
안 할머니가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자 이 할아버지는 “밤낮 없이 매일 보는데 큰 소리 날 일이 뭐 있겠느냐”며 단박에 응수하신다.

시집 장가간 6남매에게서 얻은 손주만 12명. 명절날이면 밥그릇과 수저가 모자랄 판이다.
이 할아버지와 안 할머니는 남부러울 일이 한 가지도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올초 큰 아들 내외가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우강 근처로 이사를 왔다. 집에 들어와 살려는 아들을 노부부가 극구 말렸다. 나중에 자신들이 밥 해먹지 못할 정도로 늙어지면 그때 들어와 살라고, 마음 써주는 아들 내외의 등을 부러 떠다밀었다.
“50년 해로하는 비법? 그런 거 없어. 그냥 울다 웃다보면 사는 거여. 눈이 짓무르도록 울다가도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고일 때가 있거든.”
안 할머니는 지난일을 회상하며 몇 번이나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 할아버지는 그런 안 할머니에게서 등돌린 채 시종일관 방바닥만 쳐다보고 계셨다.
이 할아버지는 모든 물음에 “할말이 뭐 있겠어”라며 무뚝뚝하게 답하셨지만, 자신 대신 말을 이어가는 안 할머니의 얘기 마디마다 방바닥에다 엷은 웃음을 흘리셨다. 또 안 할머니의 눈물을 보시곤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셨다.
노부부는 ‘50년 묵은 속 깊은 정’을,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송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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