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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정미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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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이름으로 한 시대를 건넌 청년 민권변호사


‘정의’의 이름으로 건넌 한 시대

서울역 앞 빌딩숲속에는 개미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사람들이 있다. 시각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추처럼 시시때때로 도시의 물결을 이루며 이동하는 넥타이 차림의 30~40대들. 격변의 한국사회 70~80년대를 젊음의 용광로 속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녹이고 가공하여 그나름의 추억과 역사를 만들어 온 세대.
이제는 밝은 셔츠에 보색을 맞춰 맨 넥타이만큼 안정과 균형을 갖춘 주력부대로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그들은 이 사회를 요소요소에서 떠받들고 있는 기술자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추억속에 담긴 격변의 역사는 아직도 그들의 사회적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생생하고 가깝다.
이 빌딩숲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대우빌딩' 11층에 정미화 변호사의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다. 늦가을 대낮의 햇살이 오른쪽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사무실 한칸이 정변호사의 일터였다. 정변호사는 바쁘게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에도 그러했지만 “내가 그럴만한 위인이 되느냐”고 겸손하게 거부하는 기색이 이번에도 역력했다.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는 제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약속까지 해놓고 다시한번 한사코 거부감을 토로하는 정변호사.
이쯤되면 취재를 해야할 입장인 기자도 다시한번 반문해 보아야 한다.
'왜 이사람을 인터뷰 하는가?'
그러나 답은 생각보다 휠씬 간단하다.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소외된 자들의 말못하는 아픔을 대신해서 한 시대를 건너온 진지한 청년변호사. 그러면서도 결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과대평가하지 않을 만큼 냉철한 역사관을 가진 합리적인 시민. 권력과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법'의 바른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애써온 철저한 법률가.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 사업적으로 성공해 큰 돈을 벌거나 큰 명성을 쌓았거나 권력의 상층부에 올랐거나 하는 한정된 기준으로만 바라보았던 '훌륭한 인물'의 기준보다 우리시대에는 휠씬 가치있고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이 우리가 정미화 변호사를 만나는 이유였다.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않는 시민

정미화(40세) 변호사의 고향은 당진군 당진읍이다. 정작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목회를 하시는 부친덕에 남쪽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부모님이 정착해 사시면서 고향이 된 곳, 그곳이 당진이다.
정변호사의 부친은 당진읍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분, 당진성결교회 정운기 목사님이시다.
호서중학교와 서울의 보성고등학교에 다니던 사춘기를 「문학소년」으로 지낸 정씨는 이 기간동안 수백권의 문학.철학서적속에 파묻혀 지적.정서적인 탐험에 열중한다.
“시창작에 소질이 있었던지 학생회 문예부장을 지내며 먼 학교까지 작품발표를 위해 원정을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정변호사는 잠시 회상에 잠긴다.
'소외된 인간에 대한 폭넓은 연민과 정의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적인 열정' 이것이 세속적인 불의.권위.억압에 대한 반항의식과 책속에 파묻혀 어렵게 겪은 사춘기가 그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사춘기를 어렵게 겪었다는 것은 결코 넉넉할 수 없었던 가정형편과 아직 날개를 펼 수 없는 사회적인 연령과 위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낭만적인 이상형에 조금도 합당하지 않은 세상과 인간들의 모습이 감수성 예민한 소년에게는 고통스러웠다.
이 시기에 정변호사가 그나마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책을 많이 가진 부유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야말로 ‘변호사’

‘독서’가 정변호사의 정서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면 변호사로서의 길을 가도록 구체적인 동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처럼 신심이 독실했던 어머니께서는 예수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야말로 소외된 자들의 변호사였다고 항상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판사나 검사보다 변호사직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워낙 정직한 성격탓인지 젊은 시절에 운이라고는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정변호사는 기억한다.
서울대 법대를 지망했다가 ‘3수’라는 댓가를 치렀고, 34개월 보름을 꼬박 채운 군대생활도 남보다 더 많은 댓가를 치르게 했다. 3수만에 외국어대 법대에 입학한 정씨는 군대에서도 법률학도다운 ‘논리와 따짐’으로 한동안 고참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고참들이 자꾸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키길래 내가 군에 입대한 이유를 설명했죠.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입대했다고 말이죠.”
그 뒤 몇차례 더 반격을 한 댓가는 구타와 시달림이었다. 그러나 복무규정을 ‘달달’ 외운 뒤 오히려 압력을 가해오는 이 젊은 학도에게 고참들은 더이상 규정에 어긋나는 부당한 처사를 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활동 시작

대학졸업과 함께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한 정변호사는 85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드디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아직도 시국이 어수선했던 1988년도 정변호사는 다른 젊은 변호사들과 함께 '청년변호사 모임'을 결성하고 법의 정의와 사회정의를 ‘바로 지금 이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조용한 모색을 시작했다.
당시는 이미 유명한 홍성우.이돈명 변호사등 중진변호사들이 '정법회'를 구성해 권력밑에 놓인 법의 권위를 회복하고, 법앞에 불평등한 권력과 시민의 관계를 평등하게 하려는 법조계 운동을 비교적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청년변호사 모임'은 곧 이 '정법회'와 통합하였고, 이리하여 오늘날 인권과 정의를 상징하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정미화 변호사는 이때부터 학생과 재야의 시국사건을 도맡아 그들의 불평등한 법적권리를 대신해 권리를 주장하고 호소했으며 그외에도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기층서민들을 위한 무료변호에 여러밤을 지새웠다.
수많은 시국사건 가운데 정변호사가 특별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건들이 있다.
그중에 한가지는 80년대말 노동현장에서 있었던 '민노회' 사건이다. 그때 동시에 일어났던 '남민노련' 사건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거의 받지 못했던 민노회 사건의 관련자들은 그 그늘만큼 많은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현장근로자들의 인간적인 노동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소위 ‘의식화 활동’을 했다는 '이적물 제작.배부혐의'로 30여명이 무더기로 중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90년도에 있었던 부산동의대 학생들의 '자주대오 사건' 역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관련되었던 한 학생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못이겨 동료학생 몇사람의 신변을 실토했던 최모군이 감옥안에서 여러번 자살을 시도하다가 출소한 후 결국은 자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잠깐 말을 끊고 미간을 찌푸린 정변호사의 얼굴에 쓰라린 자책감 같은 것이 스쳤다.


친분맺는 학생중
법학도 된 이도 있어

정변호사가 기억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건은 90년대초 학생운동에 대한 국민적 지탄을 부추겼던 '정원식 총리 계란투척사건'에 대한 언론의 어처구니없는 편파보도다.
사건 당시 학생변호를 맡았던 정변호사는 이 사건을 '언론이 의도적으로 카메라의 앵글을 좁게 잡음으로써 발생한 사고의 왜곡'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언론의 부추김으로 이 사건을 마녀재판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한 권력은 거슬리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내쫓고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언론을 통한 여론몰이의 위력을 정변호사는 이때 톡톡히 경험했다.
이러한 사건들에 연루돼 정변호사와 친분을 맺게 된 학생들 중에는 94년 정씨가 미국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까지 찾아와 변호사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한 이들도 있었다.


법이란 시민사회 받드는 보조자

92년부터 정변호사는 강도높은 정치적 활동대신 우리사회의 토대가 되는 경제시민사회의 법질서확립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정의실현을 위한 시민연합'에서도 활동을 새롭게 시작했다.
94년, 선진국의 판례를 연구해 ‘법 정의 구현’을 앞당겨 보겠다는 생각으로 정변호사는 훌쩍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3년만인 올 1월에 귀국했다.
6월에는 민변의 국제연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대외적인 활동을 준비중이다.
30대 후반을 이러한 '변화와 심화'의 계기로 삼느라 더욱 바빴던 정변호사는 자신이 깨달은 법의 역할과 법의 한계를 이렇게 얘기한다.
“법관이 나라의 중책이어서는 안됩니다. 선진국일수록 성숙한 시민사회를 밑에서 보조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법이 하고 있습니다. 법이란 다만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사람과 사람사이를 정돈하는 것이며 법관은 그런 일을 하는 기술자.전문가들일 뿐입니다.”
얘기 도중 정변호사는 '사람이 사람을 판결하는 판사가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변호사의 길을 권했던 어머니의 충고가 새삼스럽다고 말했다.
정변호사는 자신의 이러한 법률관을 기본으로 자기분야의 확고한 권위자가 되는 것이 바램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사회의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 확신한다. 정변호사는 머지않아 그 분야를 결정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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