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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 입력 2002.02.04 00:00
  • 수정 2017.08.10 17:26
  • 호수 405

바이더웨이 김은수 대표가 추천하는 <발해사>
고대사의 마지막 장르, 발해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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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편
출판사 / 한마당

김은수

본지 편집위원
읍내리 바이더웨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대륙 민족사

고대사의 마지막 장르인 발해를 복원함에 있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가.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그래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사의 한 영역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대륙의 우리 민족사가 제대로 씌어지기 위해선 저들에 의해 날조되고 폄하된 역사서(중국의 자치통감을 비롯한 대표적인 25개 사서) 뿐만 아니라 최근의 발굴성과를 기록한 문서에서도(러시아극동문화연구소)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역사가들의 등장이 아쉽지만 그 보다도 더 시급한 문제는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실린 왜곡된 편견이 사실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다는 데 있다.
역사는 그 민족의 혼이며 정신이다. 혼란스런 정신으로 제대로 된 걸음을 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또한 미래인 것이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일어선 발해는 조국의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 동북아의 패자로서 이백수십년간 주변을 아우르던 초강대국이었다.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높였으며 당당히 우리민족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소수민족인 말갈의 협력을 얻어 건국한 발해는 중국쪽에서는 발해말갈로 불렀지만 이는 발해를 낮춰 부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조영이 영주지방에서 시작한 주권회복운동에 말갈인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일 모든 통치권은 당연히 고구려 당족과 귀족계통이 차지하게 된다.
본래 말갈은 고구려때의 숙신과 음루였는데 후에 물길로 불리다가 말갈로 불리었으며 발해가 망한뒤론 여진으로 불리게 되고 청나라를 건국한 뒤 만주족으로 불리게 된다.
종래에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하던 대다수 고구려 후예들과는 달리 말갈인들은 짐승가죽을 입고 수렵생활을 하던 비정착민들이었다.
이 책은 이와같은 일련의 주변관계들을 창건에서부터 발전, 국가제도, 종말, 발해부흥운동, 문화 등 다양한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발해의 창건부분에선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와 같은 내용들이 북한 사학계에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8세기 중엽 발해가 융성해가던 시기에 당나라는 안사의 (안록산) 난으로 벌진들의 할거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산동지역에 할거하던 평포치청절도사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는 사실상 독립을 선포하고 고구려 유민들로 통치권을 구성하여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제나라가 존속한 60여년간 발해국과 제나라간의 꾸준한 무역활동은 쌍방간에 상당한 이익을 남기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처럼 융성해가던 발해도 거란의 엄청난 팽창을 견제하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게 된다.
같은 민족인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반도는 이때 후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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