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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인생살이가 험한 시절이었지.
               나는 내대로 충성을 다했는데...”


 대건노인대학의 호랑이, 김영준(65세) 할아버지.
 젊은 시절부터 강력한 추진력으로 많은 일을 이뤄온 사람답게 할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팔팔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확실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어디에 가서든 ‘할말은 해야’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감찰대장’은 노인대학 학생들과 봉사자들이 붙여준 이름인데, 이를테면 ‘규율부장’격이다.
 김영준 할아버지는 예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합덕서 살아온지 벌써 37년이나 됐으니 누가 ‘타지인’이라 부르면 혼내줄 용의도 있다. 합덕땅에 젊음을 묻고 살았고, 누구보다 합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젊은시절 어려운 생활이긴 했지만 남 탓할 일 없이 적극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한가지 가슴에 묻어 온 슬픔이 있긴 있었다.
 6.25때 한국군이 남하할 때 군에 입대한 할아버지는 대구 팔공산전투, 포항전투를 비롯해 많은 전투에 참가하고 유엔군을 따라 두만강 가까이까지 갔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야간전투가 불꽃이 튈때 할아버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그만 척추를 다쳤다. 그뒤 할아버지는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했고 병원에서 명예제대를 했다.
 「예편과 동시에 최고의 국민임을 가찬하여」 주는 명예제대증을 갖고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사회에 발을 디뎠다.
 “그때는 나라가 형편이 어려웠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친 명예 하나만 갖고 만족했지. 그래서 보훈신청을 하지도 않았어.”
 그러나 자부심 하나로 사회를 이겨내기엔 힘이 부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한전에 근무하다가 상처가 도저서 퇴직하고, 전업사를 차려서 운영을 하다가 그것도 역시 몸이 견디지 못해 그만 두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회활동에는 여전히 적극적이었다. ‘하면 확실히 해야 하는’ 성격탓에 서야고등학교 이사를 10년동안이나 지내게 되었고, 합덕여중쪾고 이사를 16년이나 지냈다. 신협이사도 지내고 복자회 고문도 지냈다. 김영준 할아버지의 다른 이름중에 ‘평생이사’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서야고등학교로부터 ‘평생이사’라는 명예호칭과 금뺏지를 받았다.
 “아, 참! 내가 육군병원에 있을 때 전국미화작업대회에서 1등을 한 적이 있었어. 그때 내가 36호실 실장이었지. 남들은 만국기니 뭐니 온갖 휘황찬란하게 병실을 꾸몄는데 나는 그냥 병실 구석구석 깨끗이 닦았지. 그리고 썩은 무궁화나무를 구해다가 벽에다 걸고 그 밑에다 내가 지은 시를 써 붙였었어.
 「싹은 돋았다. 민족의 표상인 거룩한 무궁화 꽃이 오! 그대여 너는 배달의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길이 빛나라」 이런 시였지. 그리고 「건강」이라는 한자를 크게 써서 오려 붙였지. 병든 군인들에게 건강만큼 소중하고 진실한 것이 어디 있든가.”
 할아버지는 젊어서 시를 즐겨 썼다. 노인대학 교가 작사도 김영준 할아버지가 했다. 즐겁고 명랑한 할아버지의 표정속에 한가닥 어둠이 깃든 이유는 뭘까? 할아버지는 또 전쟁으로 얼룩진 젊은시절을 얘기한다.
 “참으로 인생살이가 험한 시절이었지. 나는 나대로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이가 들어 보훈신청을 했더니 등외판정을 받았지 뭔가. 참말 서럽더구만”
 그것만이 아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가족적인 불행을 할아버지는 전쟁의 와중에 겪어야했다. 요즘은 합병증으로 눈이 잘 안 보이고, 당뇨에다,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
 “그래도 작년에는 죽다가 살아났어. 사회에 더 바칠 것이 있는지 요즘 도로 나아졌지. 죽는 날까지 할 일이 있으면 하다 죽어야지. 언젠가는 건강 대신에 얻은 명예도 되찾을 수 있을거야”
 할아버지 표정속에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현실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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