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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4-26 19: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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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시작해
민청련쪾민통련쪾국민운동본부쪾전민련으로 이어지는
재야운동사의 산 증인


 일요일 오후의 인천거리는 나들이 차량들로 체증이 심했다. ‘교통대란’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무척 바쁜 사람이라는데...’ 기다리고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약속장소는 바로 코앞이었는데도 간신히 찾아갔다. 다행히 박우섭(40세) 실장은 ‘당진에서 온다는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해왔고 90년도에 제도권에 진입, 현재 민주당 정책연구위원회 정책 2실장을 맡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당진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부모님은 지금도 당진에 살고 계시다는 것. 박우섭 실장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것이 전부였다.
 ‘똑똑한 사람’이라니 언변도 뛰어나고 차림새도 말끔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박실장의 첫인상은 무척 ‘소박’했다. 평상복 차림에 까무잡잡한 얼굴, 차분한 말투에서 부담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운 학문탐구가
불가능했던 대학시절

 “당진천변에서 쥐불놀이를 하던 생각이 나요. 도시락 못 싸오던 애들과 밥 나눠먹던 생각도 나고, 그때 동창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어요”
 박우섭 실장은 당진에서 지냈던 어릴적 얘기로 말문을 연다. 부친이 경찰 공무원이었던 관계로 박실장은 국민학교를 세곳이나 옮겨 다녔다. 서산태안국민학교에서 기지국민학교로, 그리고 4학년때 당진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국민학교 시절 박실장은 얌전하고 온순한 우등생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른바 ‘운동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예전의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적쟎이 놀랬을 것이라고 박실장은 말한다.
 66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경, 서울 용산중학교와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72년에 서울대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는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어요. 미생물학과를 선택한 것도 신의 창조섭리를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러나 당시 대학의 현실은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여건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72년, 그해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었고 학교가 문을 닫았다.

연극반 활동을 통해 암울한
사회현실에 눈을 떠

 “유신헌법은 국민이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권리조차 박탈한 초헌법적인 악법이었죠. 따라서 반유신투쟁을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였어요”
 당시 서울대 문리대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학문적 기운이 형성되어 있었고 박실장은 연극반 활동을 통해 김지하 시인, 임진택 선배등을 만나면서 암울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옳다고 판단되는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기질과 어릴적부터 종교생활을 해오면서 고난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라는 기독교적인 윤리관을 갖고 있었던 그는 스스럼없이 험난할 수밖에 없는 반독재투쟁을 결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연이은 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이었다. 

수배와 구속으로
점철된 청년시절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 75년 긴급조치위반으로 제적, 그리고 80년도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3년간 수배생활, 86쪾87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차례나 투옥되는 등 박실장은 유신독재와 5.6공 정권의 공안통치에 대항하면서 수배와 구속으로 점철된 청년시절을 보냈다.
 5.17이후 수배상황에서는 ‘간첩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으로 알려졌던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박계동씨와 광주항쟁일지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유신시절의 연극반 동기들과 노동현장에서 문화운동을 하면서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민중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원인이 우리사회의 구조화된 부정부패와 민족분단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박우섭 실장은 본격적으로 재야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 83년 김근태, 장영달씨와 최초로 합법운동의 장을 열었던 민청련을 결성했고, 86년에는 민중운동의 대표조직이었던 민통련에서 활동했으며, 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민운동본부에서는 총무국장으로 활약했다. 88년 고 이범영씨와 민청련 공동의장이 되었고, 89년 해방이후 최대의 재야연합조직인 전민련이 결성되면서 대변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축소된 야당과 재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추진된 통추회의의 간사를 맡으면서 제도권 진입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재야정치운동에서 제도권으로

 “87년 이전에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제도적인 방법이 투쟁의 유일한 형태였죠. 그러나 87년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에는 선거를 통해 변혁을 추진해 나갈 대표를 선출하는 운동을 방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쪾농민운동등 기층민중운동을 강화해 나가는 것과 함께 정치권내에서 변혁세력의 수권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통추회의의 연합모색은 실패로 끝나고 박실장은 이우정, 김말룡, 신계륜씨와 신민당에 입당, 부대변인을 맡게 된다. 한편 통추회의 의장이었던 이부영씨는 민주연합파 68명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야권이 분열돼 있던 상태에서 91년에 실시된 기초쪾광역의회선거는 민자당 압승, 야권 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신민쪾민주당은 통합을 했고, 박실장은 통합민주당의 부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92년 인천북 을지역에서 총선출마를 계획했으나 공천에서 탈락되었고 지난해부터는 민주당 정책연구위원회 정책 2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민주당내 재야출신의원들의 결집체인 ‘민주개혁모임’의 사무차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신념에는 변함없어

 “제도권에 진입한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라고 묻자 박실장은 웃으면서 “생활이 편리해졌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통일된 자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다만 계파간 혹은 세력간 힘의 관계에 의해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되는 현실정치 구도속에서 어떻게 그 신념을 관철시켜 나갈 것인가가 박실장이 꾸준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였다.
 “생각만큼 잘 안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정치권 상층부의 흐름을 알 수 있고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도 느낍니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정치적 이념을 실현시키는 데에 큰 힘이 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박실장은 “진보적 관점을 가진 세력들이 결집해 정치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현시점에서 중요한 과제”라고  덧붙인다.

지역언론은 주민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지난 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후 조문논쟁과 주사파 파동으로 조성된 사회전반의 보수회귀 분위기와 맞물려 수구세력의 움직임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이 오랜 반목을 깨고 회동을 하는가 하면 지난 10월 26일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15주기 추도식이 대대적으로 거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상당수의 국민들은 ‘박정희 시대의 복권’ 움직임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나라의 경우 식민통치나 독재치하에서 해방이 되면 독립운동가나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세력이 집권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어요. 필연적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누적이 되면서 수구세력의 힘은 강고해 졌습니다. 김영삼 정부도 과거청산 문제에는 미온적입니다. 5.18에 대한 평가를 유보했고, 12.12를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역들을 기소유예 시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리고 국민들은 ‘정의’보다는 ‘효율성’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문제는 접어두고 미래를 준비하자’는 식이죠. 물론 보수언론이 이러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데 큰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박실장은 “국민들에게 올바른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언론쪾교육쪾문화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혁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러차례 대변인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그는 특히 민주적인 언론의 필요성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자방자치시대를 맞이해 지역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전한다.
 “힘든 점도 많겠지만 지역언론은 가까운 접촉이 주는 힘이 큰 만큼 지역민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또한 지역내 의견이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더 나은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유도해야 하구요”

불의에 대한 분노보다는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

 암울했던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항상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가 아닌 시대적 요구가 무엇인가였고 그에 충실히 부응해 왔다. 그가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의지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믿고 이해해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식의 잇달은 수배와 투옥소식을 전해들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기도로써 자신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던 부모님. 80년도 도피생활중에 만나 약혼을 하고 83년 수배해제후 당진감리교회에서 비로소 면사포를 쓸수 있었던 아내, 그리고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그와 같이 변혁의 길을 가고 있는 두 여동생이 바로 그들이다.
 박우섭 실장은 “불의에 대한 분노보다는 정의에 대한 사랑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보다는 ‘사랑’이 훨씬 생명력이 강하고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이 명 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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