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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선생 빼닮은 심재호씨, 누구인가?

 

심재호 일간뉴욕 발행인

심훈선생 빼닮은 심재호씨, 누구인가?


식민저항정신에서 분단시대 민족언론인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시대정신 비극적인 가족사



 심훈선생의 셋째아들 심재호씨가 30년간 보관해온 심훈선생의 유작 친필원고와 사진들을 내놓았다.

 이 유품들은 심재호씨가 언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전국을 누비며 찾아낸 것들로 이것을 토대로 1960년대에 심훈전집을 내놓은 적도 있다.

 언론인이자 민간통일운동가로 남다른 인생을 살아온 그가 ꡒ당진이 나를 부활시켰다ꡓ며 유품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굴곡많은 가족사를 더듬어보는 심정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심재호씨를 만나본다.  /편집자주/




 심재호(60세)씨는 지난 85년 잠시 당진에 다녀간 뒤 꼬박 10년만에 다시 당진을 찾았다. 충청남도와 당진에서 좧심훈선생 유물관좩을 짓는데 예산을 얻기 위해서는 증빙이 될만한 유품이 필요하다고 요청이 왔기때문이다. 그렇다고 심재호씨의 이번 방문이 유물관에 필요한 유품을 증빙하기 위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위치로 보아, 더구나 심훈선생의 민족적쪾문학적 위치로 보아 유물관 건립은 그가 유품을 내놓기만 하면 중앙 어디서라도 가능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심훈선생은 인도의 ꡐ타고르ꡑ와 함께 최초의 민족저항시인으로 작품 ꡐ그날이 오면ꡑ과 기네스북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재미한인신문 좧일간뉴욕좩의 발행인으로서, 날카로운 칼럼니스트로서, 10년간 1천2백명의 이산가족을 찾아준 민간통일운동가로서 그의 명예와 신망은 아버지 심훈선생의 그것에 필적한 만하다.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씨가 미국을 방문하면 만인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인터뷰를 먼저 해야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이산가족찾기의 일등공신으로 북한에서도 유일하게 기관원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귀한 손님이 바로 그이다. 어쩌면 심훈선생이 살았던 식민지시대보다 더한 속병을 앓고 있는 한국현대사에서 양쪽의 고통을 모두 보듬으며 그는 한민족의 굳은 정기로 우뚝 서있다.

 이런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1987년에 창립된 카터재단의 좧국제분쟁조정기구좩의 창립회원이며 1989년에 직접 조국평화협회를 창립했고 90년에는 뉴욕 남북한 영화제를 조직해 남북의 유명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던 당사자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복자 면한 ꡐ필경사동이ꡑ


 심훈선생의 셋째아들인 심재호씨가 부곡리 필경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심훈선생이 서른여섯살의 나이로 타계하기 다섯달 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 ꡐ필경사동이ꡑ로 간신히 유복자를 면했다. 때문에 그의 기억속에 아버지의 살아있는 모습은 없다.

 또 아버지의 사망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자기가 태어난 필경사의 당시 모습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자기를 키워온 할머니의 강직하고 곧은 모습을 보며 ꡐ그녀의 아들 심훈ꡑ을 미루어 알 뿐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휘문소학교를 다니다가 6.25전에 송악에 다시 내려오게 돼 심재영씨와 기거하면서 송악국민학교쪾예산중학교를 다녔다. 이때 할머니를 따라 달랑달랑 쫓아다니며 ꡐ전통ꡑ이라는 걸 배운 집이 송악 안박사(안만수 옹)네라고 한다. 누구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고춧가루와 소금을 볶은, 반찬 아닌 반찬을 먹으며 심훈을 꼭 닮았다는 애정과 채찍의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 없는 심재호는 자랐다.

 그는 아버지가 심훈선생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법이 없었다. 서울고 시절 선생님 한분이 ꡐ옆반에 심훈선생의 조카손자가 있다ꡑ고 말하는데 옆자리 친구가 ꡐ여기 아들도 있는데요!ꡑ하는 바람에 깜빡 속았던 선생님으로부터 따귀를 맞은 적이 있었다. 어린녀석의 당돌한 침묵에 대한 감탄과 연민의 표시였다.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언론인


 혼자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심훈전집을 낸 것은 1966년. 당시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웠던 동아일보 입사제의를 한차례 거절하면서 그는 아버지 유작정리에 열을 쏟았다.

 동아일보사에 10여년 기자로 재직했으나 신동아사태가 발생, 중앙정보부의 행패를 보다못해 ꡐ기자가 글을 못쓰면 기자가 아니다ꡑ는 각오로 사직서도 없이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그 와중에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은 아버지의 친필원고였다.

 한국의 저명기자에서 미국의 막노동꾼으로 인생의 전환을 맞는 최초의 10년은 그에게 쓴약 같았다. 그러나 그 생활이 자신을 터지게 하고, 커지게 하고, 열리게 했다고 한다.(심재호씨는 열정적이고 표현이 다분히 문학적이다.)

 그뒤 10년간 심재호씨는 ꡐ형제들을 찾으라ꡑ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북한에 있는 큰형을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ꡐ이산가족ꡑ이라는 민족문제의 핵심에 놓이게 된다. 1천2백명의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면서 앞서 10년간 번 돈은 고스란히 다 썼다. 그리고 남아있는 젊은 열정을 다 쏟았다.

 그간 북한에서 세번, 남한에서 두번 쫓겨나는 고초를 겪었으나 매번 사과를 받아냄으로써 명예를 스스로 회복하는 자존심도 그는 잃지 않았다.



ꡐ상록수의 고향은 필경사ꡑ


 심재호씨는 ꡐ사과ꡑ(?)하기 위해서 이번에 당진을 방문했다고 한다. 인생에 사과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의 일, 고향의 일을 돌보지 못한 점에 대한 사과이다.

 그는 지난 3십여년간 나라와 민족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남보다 앞질러 달려온 세월의 뒤에서 가족과 고향의 일이 보살핌 받지 못한 채 있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리고 그동안 각계와 주민들의 관심속에서 필경사가 복원되고 지켜진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ꡒ당진에 계신 여러분들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ꡓ고 심재호씨는 말했다.그래서 그는 선뜻 30년 지켜온 심훈선생의 유품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장점뿐만 아니라 고난과 고통을 수반했던 가족사가 결국은 아버지 심훈선생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바로 그 아버지의 유품을 내놓는 일이 좀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둬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혼백을 떼어내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심재호씨는 ꡐ내고향은 필경사요, 상록수의 고향도 필경사ꡑ라고 거듭거듭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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