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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사진
  • 입력 2005.09.05 00:00
  • 수정 2017.08.12 00:49
  • 호수 578

당진주유소 대표 원종경
"60년대 농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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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구룡리에서 석고공장을 운영하셨었다. 그럭저럭 공장이 잘 돼 이웃들 대부분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난 큰 어려움 없이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울 유학길에도 올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자진근로대’라는 봉사클럽에 몸담게 되었다. 일찌감치 ‘서울물’을 먹었음에도 상부상조하는 농촌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자진근로대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 농촌봉사활동이나 보육원 같은 곳을 방문하는 써클이었다. 그 당시 농활은 계몽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낮에는 농가 일손을 돕고 저녁때에는 글모르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곤 했다.
첫번째 사진은 1967~8년도 즈음, 써클친구들과 송악면 오곡리로 농활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는 농촌계몽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의 고향이 바로 당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당진으로 농활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친구들은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빡빡머리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사진속에는 맨발인 아이도 있는데 당시엔 물자가 귀했기 때문에 신발없이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일부는 짚신을 신었고 어쩌다 고무신을 갖게 된 아이들은 신발이 닳을새라 품에 안고 다니다가 돌맹이가 많은 길에서만 꺼내 신곤했다.
두번째 사진은 역시 그 무렵 농사일을 거들다가 점심을 먹고 나무그늘아래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이다. 뒤에 보이는 초가집 모습이 전형적인 당시 농촌풍경을 보여준다. 이 초가집들은 70년대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래와 함께 새마을 운동 바람에 모두 사라졌다.
세번째 사진은 현재 기지시교회 자리에 있었던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함께 갔던 친구들과 보육원 보모들의 모습인데 뒷줄 가운데쯤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나다. 우리는 푼돈을 모아 라면같은 비상식량과 과자 등을 사들고 보육원엘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네번째 사진은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했을 때인데 당진에서 농활을 끝내고 친구들과 예산 수덕사로 놀러가기 위해 서산터미널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뒤에 있는 완행버스의 모습이 그때를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며칠 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다. 졸업이후 한번도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는데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고 동창회보도 보내주었고 모임에 꼭 나오라는 말까지 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전화한통을 계기로 난 고등학교 졸업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졸업앨범을 꺼내보았다. 그제서야 옛 친구들의 얼굴과 그때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앨범속에는 한때 아나운서로 유명했고 지금은 정치인이 된 류근찬이와 야구해설로 이름을 날린 하일성이가 지금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내년 동창회엔 꼭 참석해 볼란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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