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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 입력 2006.05.29 00:00
  • 호수 615

백년만에 전통 백련검 복원한 이은철 장인 “신평시장의 대장간 풍경, 내 삶의 교사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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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전통철 제작 복원 외길, 명검 향한 집념 “불가능을 현실로”

▲ 중학교 시절 학교를 오가며 곁눈질로 보았던 대장간 풍경과 발갛게 달궈진 쇠, 그 원초적인 붉은 색에 매료됐었다는 그는 고향 신평이 원천적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화덕에서 달궈진 쇠를 꺼내 접쇠작업 중인 이은철 장인.

 백년만에 전통검을 복원한 도검장인. 철의 왕자. 그의 이름 앞엔 이제 이런 수사가 따라붙는다. 이은철씨. 전통제철 방식을 복원하고 백련검을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지난 2004년도부터 수차례 매스컴을 탄 그가 알고보니 당진사람이었다. 신평면 운정리가 고향인 그는 현재 경기도 여주에서 대장간을 차려놓고 20여년간 일제침략이후 명맥이 끊긴 전통 철 제작을 연구하고 보검을 만드는데 모든 세월을 바친 장인중의 장인이다. 내놓을만한 학벌도 가문도 변변치 않은 빈농의 아들이 2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한반도 철기문화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은철 장인. 그가 만들어내는 검은 여느 검과 다르다. 아니 다르다기 보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다. 현대적인 공법으로 만들어낸 쇠를 그라인더로 갈고 닦아 만든 검이 아니다. 철광석과 참숯을 점토로 만든 용광로에 넣어 철을 뽑아내고 이 철을 수백, 수만번 두드려 만든 백련강으로 ‘빚어낸’ 검이다. 이같은 방식은 구한말 서양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다가 일제침략 이후 완전히 명맥이 끊긴 우리 고유의 전통 철제작 방식을 따른 것이다.
그가 전통 철제작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한편의 평론을 통해서였다. 어렸을적부터 미술과 조형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80년, 그의 인생을 바꾼 한편의 평론을 접하게 되는데 바로 계간미술 편집인이자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이종석 선생이 쓴 ‘비법을 잃고 장신구화한 장도’라는 제목의 평론이었다. 이종석 선생은 이 글에서 ‘철도의 레일이나 자동차 스프링을 녹여 만드는 도검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며 ‘원철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이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 글을 접하고 이은철 장인은 기록도, 스승도 없는 전통 철 제작 연구에 들어간다. 칼을 만드는 일보다는 칼의 재료인 철부터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근본을 향한 집념이었다. 그때가 1984년, 그 후 15년간 그는 가족과의 연락도 두절한 채 여주군 고달사지 터 부근에 터를 잡고 전통철 제작작업에 들어간다. 청계천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고문헌을 뒤지고 금속학, 재료공학, 열처리, 화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전국의 야철지(쇠부리터)를 찾아 발품을 팔아가며 쇳조각들을 찾아 그 성분을 분석하면서 100여년전에 끊긴 철제작 기술을 더듬어 올라갔다. 10여년 이상 공부하니 철제작에 관한 이론적 토대가 다져졌다. 이제는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철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재료는 철광석과 숯, 그리고 점토다. 그는 좋은 철광석을 얻기위해 강원도 폐광지역을 돌아다녔다. 점토는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인데 ‘로’를 만들어 그 속에 숯과 철광석을 넣어 온종일 풀무질하며 불을 때고 나면 슬래그(쇳똥)와 쇳물이 용광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철광석에서 뽑아낸 괴련철을 쇠로 만들기 위해선 강철로 단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련철을 다시 화덕에 넣고 달군 후 담금질과 메질을 반복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탄소함량을 균일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강철은 오랜시간 줄과 숫돌로 갈고닦는 과정을 통해 검으로 태어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검에는 나무의 나이테같은 무늬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외유내강의 보검이 비로소 만들어 진다. 

철광석에서 쇠로, 쇳덩어리에서 강철로 그리고 검으로 이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은철 장인은 혼자서 해냈다. 인대가 끊어지고 눈동자에 파편이 튀어 사시가 되고 이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보장되지 않던 미래는 자식까지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단하나. 사라진 전통을 되살려 내기 위해서다.
이은철 장인은 2003년도, 비로소 전통제철의 완벽한 복원에 성공했다. 그리고 각종 매스컴에서 그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을 비롯, 한국방송공사의 뿌리깊은 나무 등 각종 방송,신문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그렇게 유명세를 타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이 만든 검을 지금까지 단 한자루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아직까지 자신이 만족하는 명검을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에게 철은 또 명검은 어떤 존재일까.
“철은 검고 투박한 소재를 얼굴이 훤히 비칠정도의 눈부신 작품으로 만들어 낼수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공품이죠. 그리고 아무리 겉장식을 화려하게 한들 몸체가 올바르게 제작되지 않은 검은 문화적 가치가 없습니다, 백련제강 과정을 거친 보검에 전통공예기법으로 아름답게 장식을 한 검이 바로 명검입니다.”
미술을 공부한 그는 도신은 물론 칼집과 환두대도까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있다. 작업이 더딜 수 밖에 없고 그럴수록 명검을 향한 집념은 더욱 강해진다.
“20여년간 경제활동이란걸 해보지를 않았어요, 순전히 처가에 의존해서 살아왔죠. 어머니께서 지금도 일을 하시는데 만날때마다 5만원씩 용돈을 타서 쓴답니다(웃음).”
그는 고대제철기술을 복원했다는것과 조상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칼을 만들었다는 것, 이 두가지 면에서 내용적인 완성을 보았다고 여기고 있다. 이제 이 기술을 보존하는 건 나라가 할 몫이라는 것. 화려했던 한반도의 철기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는 작업은 더 이상 개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지금, 또 앞으로도 그에게 남은 과제는 오로지 조상들의 숨결이 담긴 명검을 만드는 것이다.

 

이은철 장인은?
1957년 신평면 운정리에서 아버지 이두하씨(작고)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이은철 장인은 한정초등학교 16회, 신평중학교 7회 졸업생으로 중학교 졸업 후 신평시장내 철공소에서 2년여간 일했다. 학교를 오가며 곁눈질로 보아온 대장간 풍경과 빨간 불빛은 그의 색감각을 자극했다. 당시 철공소 주인이었던 이영구(현재 신평 금천리 거주)씨는 이은철 장인의 첫 스승. 이영구씨가 기억하는 이은철 장인의 그 시절 모습은 외곬수였으나 무척 성실했다. 이은철 장인은 ‘펑퍼짐한 고향의 들판은 조형감각을 길러주었고 20여년간 스승없이 혼자서 전통 철의 제작 방식을 익히고 실제 완성품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지난했던 세월을 버텨온 힘은 바로 굴욕스럽게 보일 정도로 잘 참는 당진사람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학창시절 그는 공부엔 별다른 흥미가 없었고 대신 미술엔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친구 김영규씨는 “만화책을 보고 그대로 옮겨 그리길 즐겨했고 한번은 지폐를 필사하다가 선생님께 혼이 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장간 일을 하다가 미술공부를 위해  객지로 나갔으며  그의 가족도 1979년 수원으로 이사를 가면서 당진과의 연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은철 장인은 지금도 자신의 원천적 스승은 바로 ‘고향과 대장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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