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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암 투병 후 노인학교 선생님으로 다시 교단에 선 전 교장선생님 정.삼.섭

김태숙l승인2007.05.14 00:00l(6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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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을 걸어온 선생님은 칠순이 넘은 오늘도 가르침의 길 위에 서 계십니다

“삶은 기적이에요. 가르치는 일은 행복이구요
 죽는 날까지 할 일이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삶은 무료한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이 아닙니다. 삶은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경이로운 곳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는 이유는...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그것을 바라볼 줄 모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는 것, 눈을 떠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에서 따사로움이나 그윽한 느낌을 받는 것, 오래 전에 가슴에 맺혔던 일이 문득 잊혀진 것, 그래서 오늘 다시 거울을 보며 내가 웃는 것, 겨우내 메말랐던 나뭇가지를 푸른 잎들이 뒤덮고 있는 것, 오늘 아침 출근길에 앞차와 부딪힐 뻔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우리는 이 모든 기적을 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에는 기적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기적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 순간 우리의 삶은 놀라울 만큼 기적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삶이 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지내셨고 칠순이 넘은 지금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일생은 가르치고 나누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길만을 걸어오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길을 온전히 걸어간다는 것은 길 위에 놓인 비탈과 굽이를 피하지 않고 모두 따라 걸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서는 평생 걸어온 길의 지도와 삶의 궤적이 느껴집니다. 치열했을 삶의 현장과 학생들에게 무한히 베풀었을 따사로운 인정, 찬란했을 영광과 눈물젖은 고난, 태산같은 의연함과 옹달샘같은 고적함, 하늘같은 평화와 땅같은 분주함. 한 사람에게서 이런 궤적을 읽어내려 가다가 문득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생을 모름지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에게서는 그에 따른 영광만이 아니라 갖가지 한계를 넘어가다 찢어진 상처와 그 상처를 감싸안은 눈물의 냄새까지도 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1936년에 태어나 스무살이 되던 1955년부터 1999년까지 무려 45년간을 교직에 계셨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가정을 돌보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나이 30대에 교감을, 40대에는 장학사를, 50대에는 교장을 맡으며 늘 ‘지역최초’, ‘여성최초’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두 남매와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가족을 보살피는 가장의 역할을 하며 얼마나 고달프고 힘겹게 삶을 가꾸어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연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래된 가옥에서 아주 오래된 가구들과 함께 노년의 삶을 소박하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살아온 과정이 기적이었고 신의 은총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이 삶이 기적이라고 믿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2004년에 일어났습니다. 퇴직 후에도 퇴직교원모임과 여성활동 등으로 바쁘게 지내시던 선생님은 어느날 갑자기 암선고를 받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수술일정을 잡아놓은 후에는 기력이 쇠진한 가운데에서도 애써 의연함을 지키며 바빴던 사회생활을 정리하셨습니다. 수술을 위해 도시 큰 병원으로 떠나시던 바로 그날, 대문 앞에 흐드러진 목련꽃 아래서 선생님이 비로소 흘린 눈물과 말없이 그 분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봄에도 꼭 이 꽃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던 우리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두려운 기다림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그분은 돌아오셨지만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은 당진감리교회 노인대학과 여성의전당에서 어르신 학생들의 한글교수를 맡아 또 다시 열렬한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2007년 봄 어느 날의 풍경입니다. 정삼섭(72)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질문하고 답변하며 분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젊은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나이가 들었다는 것 뿐입니다. 학생들 중 몇몇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 부드러운 은빛입니다. 은빛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이순(耳順, 60세)이나 고희(古稀, 70세)를 지나 인생을 웬만큼 터득한 분들이 배우고 있는 것은 바로 한글입니다. 학생들은 왼손으로 공책을 꾹 눌러 지탱하고 오른손에 힘주어 잡은 연필로 한땀한땀 정성스레 바느질 하듯이 공을 들여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과 지낸 수십년의 세월에서 얻은 선생님의 지혜와 기술은 이제 예술이라 할 만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쳐주는 큰 박수와 격려에 미소와 자신감으로 화답하고 선생님께 언제나 머리숙여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떤 어르신은 집에서 키운 상추를, 어떤 어르신은 동네어귀에서 뜯은 쑥으로 쑥버무림을 만들어 한바구니씩 가져다 선생님께 드리고 자기들끼리도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이 나이든 학생들이 선생님과 급우들에게 전하는 애틋한 사랑임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이 사랑을 거리낌없이 나누어 갖습니다. 이 교실에서는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가 그저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삶이 기적이라고 믿는 선생님은 자신이 죽음의 고비에서 서성일 때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또한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죽는 날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 생각에 몸이 아픈 것도, 힘이 든 것도 자주 잊어버립니다. 선생님은 그 사이에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어르신용 한글교안을 직접 만들고 날마다 열심히 수업준비를 했습니다. 그 덕에 기역 니은에서 시작한 어르신들의 한글공부는 단어를 넘어 이제 문장공부로 넘어갔습니다. “이제는 쉽고 아름다운 동요를 모아서 한글을 더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해. 그럴려면 풍금이나 악기도 필요한데 어쩌나. 그리고 동요와 함께 그림그리기도 할 거야. 아마 내가 사범학교를 안갔으면 미술대학을 갔을 거야. 그만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거든.”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선생님의 얼굴,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의 얼굴은 열의와 기대로 가득해 보입니다.

글_ 김태숙 | 사진_ 최운연


김태숙  tskim@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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