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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리스트 고재붕·고재범 형제 - 미국에서 태권도장 운영하며 500명 후진양성

미국에서 가르치는 제자 12명과 <태권도 메카> 방문차 고향 당진 찾아 -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꿈꾸고 도전하는 자만이 그것을 이룬다” 김태숙l승인2007.07.09 00:00l(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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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태권도 불굴의 의지로써 미국땅에 한국정신 심는다”

 태권도가 좋아 태권도로 젊은 밤을 지새웠고,태권도가 너무 좋아 태권도로 일생의 꿈을 키웠던 한 젊은이가 꿈을 이룬 중년의 모습으로 고향을 찾았다.
 당진읍 시곡리 출신 고재붕(49)씨는 지난 7월 4일 읍내에 있는 식당 백년회관에서 당진태권도 선후배들과 함께 모처럼의 회포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제1호 당진태권도장 관장이었던 원로 김정시 선생과 충남태권도협회 이병노 부회장 등 원로태권도인들이 선후배들과 자리를 함께해 고씨의 고국방문을 환영했다. 고재붕씨의 동생 고재남(46)씨도 형과 동행한 터였다.
 고재붕씨는 현재 미국 뉴저지 주 에섹(Essex) 카운티와 모리스(Morris) 카운티에 4개의 태권도장을 두고 동생 고재범씨와 함께 각각 2개의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양성하고 있는 태권도 지망생들은 약 500명. 그 중 약 5%만이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한국계 미국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내가 아닌 타인을 모두 “You"라고 부르는 문화 속에다 선생님, 부모님, 연로한 어른들에 대한 호칭과 인사법이 제각기 다른 한국의 문화를 심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흥미로왔다. 고씨에 따르면 다행히 한국의 예절문화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거부감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오히려 ‘차렷’ ‘경례’ ‘선생님께 인사’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들은 동작과 함께 한국말로 가르치기 때문에 한국말은 자연스럽게 절도와 예절, 집중과 겸손을 의미하게 되었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과 교사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과 태도 역시 대부분 존경과 감사를 담고 있다.   

 실제로 고씨는 천방지축인 현지 아이들을 맡아 6개월 혹은 1년만에 절도있고 예의바르며 학습태도가 바른 아이로 변화시켜 나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 너댓살 되는 꼬마였는데 엄마가 그 애를 도장 안에 들여보내면 걔는 현관 앞에 꼼짝않고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시간이 되면 돌아가곤 했죠. 얼마동안이나 그랬는지 몰라요. 하지만 절대 억지로 시키지 않았죠. 그런 면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발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어느 날 아이가 다가오더니 한 5분 따라하더라구요. 그렇게 5분을 하고 돌려보냈더니 차츰 따라하는 시간이 10분, 20분 길어졌어요. 결국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12년 후에 우리 도장의 태권도 사범이 됐어요. 아무도 처음에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죠.”      

 국경을 넘어, 미국이라는 넓고 종잡을 수 없는 사회에서 태권도를 통해 미국아이들의 심성에 절도와 용기를 심으며 자신감을 길러주는 한편 그들의 문화에 한국적인 것을 심고 있는 고씨 형제는 보통의 이민자와 확실히 달라보였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본인들도 자부심과 매우 깊은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정기적으로 태권도 경기와 시합을 통해 기금을 마련, 이기금을 타운과 경찰서에 기부함으로써 마약퇴치 프로그램과 타운장애인 돕기, 미래선교, 타운장학생 장학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회봉사활동을 벌여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고씨는 이것을 태권도와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태권도가 있기에 제 삶이 이렇게 특별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끼죠. 태권도가 없었다면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태권도를 할 거고 태권도를 사랑할 겁니다.” 이토록 망설임 없이 태권도를 찬양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고재붕씨의 삶은 한마디로 태권도인의 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로 자신의 꿈을 키웠던 그는 당당하고 자유로운 태권도인으로서 태권도 사범이 되어 태권도인을 양성하고 싶다는 일관된 뜻을 품고 살았다. 꿈을 향한 그의 집념은 한결같았다. 고씨가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당진태권도장의 사범을 맡았던 이병노 씨는 당시의 고씨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침잠도 깨기 전에 도장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나가보면 어김없이 재붕이었어. 태권도장 문을 열기도 전에 꼭두새벽부터 들러서 운동을 하고 학교 갔지. 뭔가 해낼 줄 알았어.”

 고씨는 고교시절 태권도부 주장을 거쳐 졸업 후인 78년에는 충남도민체전 페더급 금메달을 따내 주변을 기쁘게 했다. 그 후 7년동안 당진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재직하던 그는 어느 날 필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는 태권도장이 이곳저곳에 생겨서 내가 다시 도장을 연다면 서로 경쟁자가 되어야 할 판이었죠. 그때 과감히 미국행을 선택했어요. 당시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고 그렇다고 아무나 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죠. 외국에 나가 자랑스러운 한국의 태권도를 보급한다는 것은 당시 우리가 지녔던 최고의 꿈이었고 최고의 우상이었죠.”

 고씨는 198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주권과 언어의 장벽을 넘기까지 갖은 고생을 했지만 1992년 자신의 도장을 열게 되면서 고씨의 꿈은 서서히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15년. 고재붕씨는 동생 재범씨와 함께 미국내 자랑스러운 한국사람으로서 현지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저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껴요. 저는 꿈을 이뤘으니까요. 용기있는 자만이 도전하고, 고난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꿈을 이루는 법 아니겠습니까?” 

 2007년 7월, 자신의 문하생 12명과 <태권도 메카 방문>이라는 타이틀로 중국과 일본, 한국을 방문중인 고씨는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이 자칫 그 위상마저 중국에 빼앗길까 걱정이 태산같다. “중국은 공항부터 터미널까지 태권도로 도배를 했어요.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는 너무 무관심하고 태권도를 너무 냉대하고 있어요. 태권도를 사랑하고 태권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자신의 생을 변화시킨 태권도.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태권도. 먼 이국땅에서도 심지게 지녀온 태권도에 대한 일편단심이 정작 고국에 돌아와 흔들릴 때 그 심정이 어떠할 지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 빚을 진 느낌이었다. 
글_ 김태숙 / 사진_ 전수진


김태숙  tskim@dj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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