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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지역 명물을 찾아서 ⑥ 대호지면 적서리 차천로 선생 영당 ‘오산사’] - 가사문학의 대가, 차천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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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7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강촌별곡
오산 차천로
평생(平生) 아재(我才) 슬데 업셔, 세상(世上) 공명(功名)
하직(下直)하고, 상산(商山) 풍경(風景) 바라보며, 사호(四皓)
유적(遺跡) 따로리라. 인간(人間) 부귀(富貴) 절노 두고,
물외(物外) 연하(煙霞) 흥(興)을 겨워 만학(萬壑) 송림(松林)
슈풀 속이 초옥(草屋) 수간(數間)
지어두고 청라(靑蘿) 연월(烟月)
대사립의 백운(白雲)심처(深處) 다다두니
-하략-

불후의 명작
강촌별곡, 강호별곡을 남기다
대호만 물길이 맞닿은 대호지면 끝자락 조용한 마을, 적서리. 봄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와 농번기를 맞아 분주한 손길들이 오가는 논밭 위로 왜가리들이 날으는 풍경이 ‘강촌별곡’의 그곳과 참 많이 닮았다. 조선 당대 문인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차천로 선생의 영당이 모셔진 곳이어서일까.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가 시조 한 자락의 풍경 그대로다.
차천로 선생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강촌별곡’을 지은 인물로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되고 있다. 강촌별곡은 벼슬을 피해 경치 좋은 시골의 자연에 묻혀서 한가히 생활하는 정경을 그린 작품이다. 차 선생이 광해군 당시 모해를 입고 금강 하류에서 피난시절을 보냈던 당시 쓰인 이 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과 함께 가사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 이름을 날린 무관으로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면 문관에는 차천로 선생이 꼽힐 만큼 뛰어난 문필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사신의 요청으로 하룻밤 사이에 술 수십잔을 통음한 후 오언 율시 일백수를 내리 지어 불렀고 이를 한석봉이 받아썼다는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의 문필 실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영정 모신 오산사와 문학비
 차천로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오산사는 정조 14년(1790년)에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던 것을 고종 30년에 선생의 13대손 차영열이 영정을 봉안하고 문안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봄을 맞아 푸른 잎들이 무성히 피어난 느티나무가 멋스러운 오산사 입구에 들어서니 새마을지도자 윤희문 씨의 부인 임점순씨가 마중을 나온다. 오산사 입구에 살면서 오산사를 관리하며 손님들이 찾을 때마다 안내를 맡고 있다고.
몇 해 전 영각에 보관하고 있던 유품들을 도난 당한 이후로 영정을 비롯한 주요 유품은 임씨의 집 금고에 보관하고 평소에는 오산사를 잠궈 둔다고 한다. 그래서 종종 관광객들이나 손님들이 찾아오면 직접 문을 열어주고 안내를 하고 있다.
또 올해 초에는 마을버스 종점 인근에 차 선생의 문학비가 세워졌다. 외교문서를 전담했던 ‘동방문사’였고 가사문학의 대가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던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마련한 것이다.

인터뷰 | 차천로 선생의 15대손 차기한씨
“경모회 조직해 선조의 뜻 기리기 위해 노력”

적서리에는 차천로 선생의 후손들 130여명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차 선생이 태어난 날이기도 한 정월 대보름에는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모여 차 선생의 탄신제를 지내며 업적과 뜻을 기린다. 차 선생의 후손들 중 적서리에 살며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는 경모회 간사 차기한(72) 씨를 만나봤다.
“차천로 할아버지의 글을 두고 ‘수용산출’이라고 했어요. 물이 용솟음치고 산이 흔들릴 만큼 웅장하고 막힘없는 시를 지으신 분이라는 뜻이죠. 가사문학에 있어서는 조선 을 대표할 만한 문인이었어요.”
그는 차천로 선생이 하룻밤 사이에 시 백수를 지어낼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고 말했다. 고향이 개성임에도 불구하고 영당이 적서리에 마련된 것에 대해서는 그의 후손인 차건의 선조가 적서리로 낙향하면서 사당이 만들어졌고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했다.
“당대의 손꼽히는 문장가였던 선조를 후손된 자로 좀 더 잘 모시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최근에는 후손들이 경모회를 조직해 정식으로 제도 올리고 문학비도 세우는 등 여러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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