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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24-04-26 19: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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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지역 명물을 찾아서⑧ 당진읍 원당리 ‘입한재’] - 불운의 천재, 구봉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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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익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재각 입한재.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7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농업기술센터 뒤에 자리 잡은 원당2리는 하얀 감자꽃 사이로 허리 굽은 할머니가 풀을 매고, 막바지 모내기가 한창인 농부의 손길이 분주한 영락없는 시골 마을이다.
조선시대 불운의 천재, 구봉 송익필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면천군 마양촌(현 송산면 매곡리)에서 노년을 보낸 뒤 이곳 원당2리에 잠들었다.
타고난 멍에를 짊어지고 산 조선시대 철학자 구봉 선생. 그의 묘는 원당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양팔로 감싸 안은 듯한 산자락 안에 위치해 묘에 오르면 원당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잘 정돈된 잔디와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묘소와 깔끔히 정돈된 사당 입한재에서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였다. 매년 음력 10월1일에는 후손과 당진유림들이 함께 묘제와 제향을 지낸다.

신분 넘어 최고 학자들과 벗삼아
‘송익필.’ 낯선 이름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율곡 이이나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구봉 선생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율곡 이이, 이순신 장군, 송강 정철, 토정 이지함 등 조선시대 최고 학자들의 막역한 벗이자 그들이 스승 같은 벗으로 대하며 존중했다 한다.
‘조선 500년 유교역사상 최고의 도인’이라 칭송받던 구봉 선생은 서출이라는 신분과 아버지가 기묘사화와 관련돼 죽음을 당하면서 집안 전체가 역도로 몰려 힘든 생을 살아왔다. 그리해 구봉 선생은 벼슬길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매진하며 살았다. 이이, 성혼 등과 사귀며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문장도 능해 팔대 문장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20대 후반부터는 구봉산 아래에서 문호를 열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문하에는 김집, 강찬, 김반 등 많은 학자들이 있었다.

임진왜란 국난 대비한 다양한 일화
이런저런 이유로 역사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다양한 일화가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이순신에게 거북선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이름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을 훌륭한 장수로 가르친 이야기, 남명 조식과 교유하며 임진왜란을 대비했다는 이야기 등 숱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일화의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전후해 국난에 대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내용들이다.
이율곡에게 왜군의 침략을 알려준 것도 구봉 선생이라는 일화도 있다. 이율곡의 ‘10만 양병설’ 또한 송구봉의 지혜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서에는 당쟁에 휘말려 불우한 삶을 살아온 지식인으로만 그려져 있지만 구봉 선생에 관한 다양한 일화와 그가 함께 학문을 논했던 학자들과의 이야기에서 그의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구봉 선생의 후손 송기환씨
“후손들 구봉 선생 뜻 기리기 위해 노력”

송기환(71)씨는 옥수수밭에서 풀을 매고 있었다. 송씨는 평생 이곳에서 흙과 함께 살았다. 30여년 전만해도 원당2리에는 구봉 선생의 후손들이 마을 주민의 1/3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들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10여 가구도 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는 “우리 구봉 할아버지만한 인물이 없지! 아주 훌륭한 분이야”라며 선조를 찾은 낯선 방문객을 재각으로 안내했다.
그는 얼마 전 묘소 잔디를 다듬고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후손들과 주민들이 모여 하루 종일 구슬땀을 흘렸다고 전했다.
송씨는 “경치가 좋아 예전에는 인근 학교 학생들이 소풍도 오고 했다”며 “요즘에도 대학 교수들이나 학자들이 종종 찾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봉 선생이 “이순신이나 율곡 같이 당시 유명했던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름난 선생이었다”며 “후손들이 그의 업적과 뜻을 기리기 위해 묘를 가꾸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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