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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지역 명물을 찾아서⑩ 마지막회 석문면 소난지도 ‘소난지의병총’ ]- 의병 항쟁의 역사가 깃든 작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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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유산과 문화유적, 그리고 후손에 전해주어야 할 가치를 가진 무형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명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없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본지는 지난해 7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올해에도 지역의 숨어있는 명물과 문화유산을 보도해 넓게는 당진의 관광산업 발전을, 단기적으로는 지역의 문화유산 보존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섬 한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섬 소난지도.   90년 째 섬을 떠난 적 없는 할머니와 몇해 전 서울에서 이사와 팬션을 짓고 살아가는 중년 부부가 함께 모여 사는 섬마을. 조개 캐는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정겨운 소난지도에는 예부터 전설 같은 역사가 전해져 온다.   6월 내리쬐는 햇볕이 제법 따가운데도 섬이라 그런지 바람이 참 시원하다. 소난지의병총 앞에 서 있다. 100년 전 일본군과의 마지막 접전을 벌였던 곳이라는 의병총은 고요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잔디와 태극기만이 나부낄 뿐이었다.   100년 전, 이 작고 고요한 섬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을사늑약 당시 의병과 일본군의 격전지

1905년, 을사늑약과 조선 군인의 강제 해산 등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경기도 수원에서 의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항일투쟁을 벌였다. 허나 의병들은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1907년 당진까지 쫓겨 내려오게 된다. 이들은 홍주 전투에서 패한 의병들과 합류해 소난지도에 의병 본진을 두고 재기를 도모한다. 1908년 3월15일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이 기습공격해왔고, 9시간동안 벌어진 총격전에 150여명의 의병들은 최후까지 육탄전으로 대항하다 장렬히 숨을 거뒀다.   그 후 나라를 위해 쓰러져간 의병들의 피맺힌 항쟁사는 전설처럼 구전되어 섬마을을 떠돌았다. 간혹 격전지였던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씻겨 유골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주민들이 유골이 약재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무덤을 도굴해 유골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평생을 난지도에서 살아온 최한용(75) 씨는 “옛날에는 소난지도가 배를 정박하기에 좋은 포구를 가지고 있어 한양으로 쌀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거쳐 가던 중요한 포구였다”며 “육지와 떨어져 있고 식량 보급이 수월한 점을 이용해 이곳에 의병들이 진을 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옛날에는 바닷가에 바지락 등을 캐러 나가보면 간혹 뼛조각이 발견되곤 했다”고 말했다.

  교사와 학생들이 되살려 놓은 역사의 현장

 의병총의 한 맺힌 역사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70년부터다. 의병무덤이 멸실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당시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이 현지를 답사해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무덤 보수를 비롯한 역사 되살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60여년간 바닷물에 휩쓸려 간 무덤처럼 역사에서 잊혀진 의병활동에 대한 학술적 고증을 찾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단지 주민들의 증언만 있을 뿐 변변한 학술자료 하나 없었다고 한다. 정부에 연구를 위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학술적 고증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에서 전투상황이 기록된 자료가 발견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1974년부터 당시 목격자였던 故 조예원 옹 등의 증언을 청취하고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이렇게 지역의 잊혀져 가는 역사는 정부나 기관이 아닌, 학교와 주민이 직접 구슬땀을 흘려가며 되살리게 된 것이다.

신이균 이사장의 장남이자 현재 석문중 교장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소난지도 의병사를 위해 애써온 신양웅 교장은 “소난지도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선조들이 묻힌 역사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에 묻혀 온데간데 없는 무덤을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굴을 거듭해 장소를 찾아냈다”며 “자전거와 배를 타고 다니면서 내 고장 전통을 가꾼다는 생각으로 학생과 교사가 함께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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