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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대표 한자리 지켜온 양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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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랑 당진읍 계림라사 대표
세월 흘러 변화하는 모습

‘땡그랑’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면 10평 남짓한 공간에 양복 원단과 미싱기 등 7~80년대 정취가 풍기는 풍경이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기성복에만 길들여져 있는 요즘세대와 7~80년대 몸에 맞춘 멋들어진 양복을 선호하던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당진읍에 위치한 계림라사는 유태랑 대표가 68년도부터 운영해온 역사 있는 양복점이다. 계림라사에 들어서기 전부터 오래된 간판이 눈길을 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져 있는 이 간판은 유 대표가 계림라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함께해 왔다. 물론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미싱기이며 책상 등 각종 재단 용품들 역시 세월의 손때가 묻어 있다.
“계림라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용하던 함석간판이죠. 색이 바라면 색을 덧칠해 사용하다 보니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상태죠. 60년대 간판을 지금 당진에서는 아마 찾아 볼수 없을 거에요.”
맞춤 양복이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 초까지 양복점 풍경이다. 요즘은 디자이너(재단사)이자 가게 주인이 이 모든 일을 혼자 한다.
그런 만큼 당시에는 양복 원단이 큰 선물이었다. 혼사 때는 으레 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옷 한 벌씩 해 입을 수 있는 예단이 오고갔다. 어떤 집안에 혼례가 있으면 보통 10벌 정도 단체 주문이 있곤 했다.
원단이 비싸던 그 시절, 양복점 마다 원단 보관이 큰 걱정거리였다. 도둑을 걱정해 양복점에서 잠을 자는 주인들도 꽤 많았다. 양복점이 워낙 많던 시절이었고, 원단을 훔쳐 싼값에 파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원단 선물하는 사람이 드물고 원단 선물이 들어왔다고 해서 곧 옷을 맞추는 사람도 드물다.
맞춤양복의 인기는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중반부터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서구의 유행과 기술, 대기업의 홍보를 등에 업은 기성복이 쏟아진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였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 바느질’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기계의 박음질’에 밀려났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양복점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요즘은 가게 운영보다는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돈이라는 맹목적인 목적보다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는 거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양한 브랜드에 디자인, 기성복 등이 등장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연락처 : 355-2516
●위치 : 당진읍 제2청사 맞은편. 명동종합광고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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