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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5) - 김석우 재인당진군민회 수석부회장] ‘성공해서 귀향한다’ 평생의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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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지면 두산리서 30여년 전 인천 상경, 남동구의회 의장 역임
젊은 시절 원목에 깔려 장애 얻어, 8년만에 아들 얻기도

그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원목 수송 차량을 몰다가 거대한 원목에 깔려 사경을 헤맸고 투병 1년 만에 다시 일어섰지만 척추 부근의 뼈가 뒤틀리고 수술 결과 두 다리의 길이가 달라져 걸을 때마다 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에서 그의 장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장애가 있다’는 말을 하고서야 약간 어색했던 그의 발걸음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남동구의회 의원을 연임하고 40대의 나이로 의장까지 지냈던 그는 늘 대중 앞에 나서야 하는 인물이다. 경쟁자들에게 늘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 밖에 없던 걸음걸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인천 남동구청장 후보로 출마해 당내 경선을 거쳤으나 공천을 받지 못했고 지난해 5.31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중앙당에서 구청장 후보를 지명해 내려보내는 바람에 출마를 하지 못했다. 현재는 개인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재인당진군민회(회장 이회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석우씨는 1954년 대호지면 두산리에서 김윤철, 정옥순 부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저희 집은 가난했어요. 아버님은 평생 농사만 지어오신 분이었는데 노력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우직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서 학비를 내지 못해 우리 형제들은 자주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부터 ‘학비를 내 손으로 벌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가 당진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김석우 부회장은 ‘시골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크게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1979년 인천으로 상경했다. 그는 당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였다.
“저는 축산업을 하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반대하셨었어요. 농사꾼은 벼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여기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인천에 올 때 부모님께 도움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이었다. 그리곤 원목수송차량에 조수로 취업했다. 그러나 취업한 지 3일만에 원목에 깔리면서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당시 그를 치료했던 의사도 ‘3일을 못 넘길 테니 부모님 얼굴을 보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고향에는 ‘김석우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고.
“1년 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잘못되어 척추는 뒤틀리고 다리를 절게 된 겁니다. 이런 몸으로 막노동을 했는데 또 15일만에 쓰러졌습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는다’
원목에 깔린 사고는 그에게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장애를 남겼다. 그는 “국가에 장애인 인정을 신청했었다면 당시 내 삶이 조금이나마 편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포기하려 했었다”며 “그러나 고향을 떠나올 때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가짐이 생각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생활도 파란만장했다. 결혼을 약속했으나 가진 돈이 당시 돈으로 1만원 밖에 없어 용현동에 보증금 50만원짜리 월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의 나이 30세.
원목에 깔린 피해에 대한 보상금이 나오자 그는 4.5톤 화물차를 구입했다. 그리곤 당진과 인천을 오가며 농산물 직거래를 시작했다. 발품을 팔며 시작한 이 일은 그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줬다고. 이렇게 밑천을 마련해 식당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점점 자본을 마련해 마침내 1982년 삼환운수를 설립했다.
“살림은 나아졌는데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병원에 가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고... 몸에 좋다는 건 모두 먹어보고 병원에서 인공수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주변의 시선에 힘들어할때면 나서서 원목에 깔렸던 덕분에 정자가 약해진 자신의 탓이라고 설명했다. 아내가 상처받는 것이 마음 아파서였다..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 기적처럼 8년만에 첫 아들이 들어섰다. 그리곤 6년 뒤에 다시 둘째를 얻었다.

정치계 입문, 의회 의장 역임
김석우 부회장은 “정치계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먼저 이야기를 해주셨다”며 “그 전에는 먹고 사는 데에 바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유총연맹 남동구지회장을 맡았을 적에 정치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저인지라 무시도 당하고 그랬지요. 저처럼 부족한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남동구의회 의장 시절 아들 또래인 고등학생들과 함께 남인천고등학교를 다시 다녔다. 3년을 꼬박 채운 뒤에는 다시 인천전문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해 늦은 나이지만 학업을 마쳤다. 지금도 방송대학교 도시공학과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의장직과 학생, 개인사업을 한꺼번에 하려니 힘이 들지 않겠어요? 목에 무리가 왔다는 것을 느꼈고 성대결절로 이어져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군민회 잘 이끌 수 있을지 걱정, “노력할 것”
그는 2006년과 2010년, 두 차례의 지방선거에서 남동구청장에 도전했으나 한번은 낙선, 한번은 출마도 하지 못했다. 2008년에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 선거 이후 개인사업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추스르고 있다.
“수석부회장이라면 다음 대에 회장직을 맡아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부담입니다. 그동안 군민회는 물론 고향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네요.”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처음의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있을 선거에 다시 출마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삶보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된 지금은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김석우 이력
-1954년 대호지면 두산리 출생
-조금초-당진중학교 졸업
-인천전문대 졸업(2008년)-방송대 행정학과 재학중
-삼환운수(주) 설립 및 대표이사(현)
-남동구 충청향우회장(현)
-재인충청도민회 부회장(현)
-인천 남동구의회 의장(2002년~2004년)
-인천광역시 남동구의원(1998년~2006년)
-행복남동발전연구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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