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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읍 환경미화원 표기풍 씨의 인생이야기] 버려진 쓰레기 줍고, 희망을 내려놓는 환경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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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항추진위 사무국장 등 활발한 활동 중 발생한 불의의 사고
“일 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살아요”

벌써 10년 전 일이다. 기억나지도 않고,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날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이었다. 서해대교를 오르자마자 접촉사고가 났다. 사고처리를 하기위해 차에서 내린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이 없다. 잘려나가 잃어버린 필름처럼.
훗날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달려오던 차가 사고차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들이받았고 사고차량이 다시 나를 치었다고 한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단다. 그말은, 백발백중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뜻일 게다. 그렇게 2년을 병원에 누워있었다. 당진에서 서울에서 친구들과 지인들이 수차례 다녀갔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웠다. 치아가 모두 부러져 나갔고 발음도 부정확해졌다. 기억력도 예전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50대가 사라졌다. 병원에서 퇴원해서도 한동안은 재활치료에 집중했다. 학교 운동장을 매일 걷고 뛰었다.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듯 보였던 걸음걸이가 조금씩 나아졌다. 나와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사고 후유증 이겨내고 다시 사회로
표기풍 씨는 ‘기억나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던’ 지난날을 힘들게 털어놓았다. 사고로 발음이 부정확해서 행여나 듣는 이가 불편하진 않을까 미안해하며 들려준 이야기다. 표 씨는 불의의 사고로 2년 가까이 병원신세를 졌다. 퇴원해서도 사회에 바로 복귀하지 못했다. 사고 전 오랫동안 무역회사에 다녔던 터라 영어회화도 가능했고 지역사회에서도 알만한 주요 사회단체 사무국장을 수차례 맡아왔던 경력이 있었지만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이에게 선뜻 일을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고로 카이스트 대학원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포기해야 했던 딸 때문이었다. 뒷바라지도 못해준 마당에 제 알아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두 딸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고 전 성실했던 표 씨의 지난 세월을 잘 알고 있던 지인 소개로 건설현장 경비를 할 수 있게 됐다. 3년6개월 동안 경비로 일했다. 아파트 건설이 끝나자 표 씨는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됐고 당진으로 내려오게 됐다. 사고 후 당진을 떠난 지 8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이었다.

사고 이후 8년만에 다시 찾은 고향
“경비를 그만두니 5개월동안 실업급여가 나오더라고요. 그 돈으로 고향 친구들 만나며 살았어요. 헌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워 지더군요. 오늘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하루를 보내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표 씨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후 표씨는 산림요원과 산불요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고 그 탓에 9개월만에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막막한 날이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문득 ‘당진을 청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내일부터는 밥 먹고 나서 당진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이 안 되는 일이어도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죠.”
그렇게 당진읍 환경미화원으로 일 한지도 1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못할 거라고 했단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10년 전 표 씨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당진항 지정의 숨은 공신, 그의 지난 시간
사고가 나기 전 표기풍 씨는 당진의 주요 사회단체에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당진항추진위원회 사무국장, 당진군개발위원회 총무이사, 상록문화제 총무이사 등을 맡았었다. 표 씨는 당진항 지정의 숨은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각계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당진항 지정운동이 시작된 1999년부터 당진항추진위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해양수산부를 수도 없이 방문해 직원들을 만났다. 당시 해수부 장관이었던 전 노무현 대통령과도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혼자도 가고, 집행부와도 가고, 공무원과도 가고, 수도 없이 갔었죠. 그 당시에 당진 경제가 무척 힘들었거든요. 당진항이 지정되면 지역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그렇게 한창 당진항 지정 운동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2002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다시 찾은 고향에서 ‘환경미화원’을 하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손사래를 쳤다. ‘지역사회에 알만한 일을 하던 사람이 청소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표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일하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스스로 열심히 사는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천재는 노력 하는 자를 이기지 못 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잖아요. 지난 과거를 부여잡고 지금의 내 현실이 안타깝다며 나를 학대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일하는 게 즐거워요. 내가 청소한 거리를 걸으며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주민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요.”
표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 당진읍 거리로 나간다. 한 손에는 집게를, 한 손에는 쓰레기 봉지를 끼운 손수레를 끌고.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담고, 대신 그 자리에 희망과 웃음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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