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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1.09.26 14:48
  • 호수 877

[칼럼] 장의환 면청향교 전교 - 도로명 주소 정정 청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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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근천(이두식으로 읽으면 버그내가 된다) 일명 버그내(합덕시내)의 지명은 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원래 합덕은 덕풍현에 속한 합덕부곡인데 고려 제25대 충렬왕 24년(1298) 고을사람 환자 황석량(宦者 黃石良)이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합덕현(合德縣)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제7대 세조 때 폐현되어 홍주목의 합남 합북 2개면이 되었고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면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합남 합북 배방 3개면이 합하여 합덕현의 옛 이름을 따서 합덕면이라하여 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원래 우강면은 범근천(泛斤川)에서 유래되어 면천군 범천면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범천면으로 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10월1일 명칭변경에 의해 우평(牛平)과 강문(江門)에서 한자씩 따서 우강면(友江面)으로 개칭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범근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범근내는 면천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임천, 한산, 서천, 남포, 비인, 홍산, 홍주, 태안, 서산, 해미, 당진, 덕산, 예산, 청양, 보령, 결성, 대흥, 석성, 부여 등 관청의 조세를 모두 수납하여 대진을 경유하여 바다에 떠서 수로로 510리 떨어진 서강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었고 이보다 100여 년 후에 펴낸 신동국여지승람 면천군조에 범근내포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범근내포가 면천군 동쪽 27리에 있는데 이곳에 창이 있어 공주와 홍주목 소속 군·현 세미를 수납해 한양으로 조운했는데 성화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땅바닥에 교착함으로 아산 공세곶으로 옮겨갔다.
신동국여지승람 신창현 산천조에 보면 정포는 현 건너 서쪽 20리에 있어 장포의 하류이다.  또 예산현의 무한천이 여기서 합류해 면천군 범근내포로 흘러 들어가고 견포는 신창현 북쪽 15리에 있어 차륜탄의 하류로 범근내포로 흘러 들어간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실측해 조선반도를 10/16*104로 축소하고 남북 22단(段:1단은 120리)으로 나누고 다시 각단을 6치6푼의 폭(幅:1폭은 80리)으로 횡절하여 제작한 조선 최고의 과학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은 산, 산맥, 하천명, 영아, 읍치, 성지, 진보, 역참, 창고, 목소, 공수, 릉침, 방리, 고현, 고산성, 도로 등이다.
철종 12년(1861년)에 초간하고 고종 1년(1864년)에 재간한 이 대동여지전도의 경기, 충청판에 면천군 소령 협삽교천 서안 당진군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사발포)가 내포(內浦)로 표기했다.  1933년 이병연이 간행한 조선환여승람 당진군편을 보면 부리포 일운 범근내포는 군동쪽 27리에 있는데 조선조에 창을 설치하여 세미를 수납하여 공주와 홍주목 소령군 세미를 경성으로 조운하다가 성화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땅바닥에 교착하여 아산 공세곶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범근내포가 부리포(사발포)라고 기록했다.  원래 버그내 저자거리가 당진사거리(당진, 면천, 우강, 고덕 방면) 일대가 5일장이 개장되던 곳이 구 한흥약포 앞과 구 신협 앞 대로에서 개장되다가 현 상신슈퍼 밑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새로 건축한 시장상가로 옮겼는데 현재까지도 시장명은 버그내장이라고 부른다. 이상과 같이 버그내와 부리포(내포)는 고대부터 400년 이상 불러 내려오는 합덕, 우강을 상징하는 지명이다. 그러므로 합덕읍, 서동서부터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내포)까지 연결된 도로를 도로명주소에 합우로로 명칭한 것은 역사고증 없이 만들어낸 역사왜곡된 도로명이다. 충남도청이 예산군 삽교읍과 홍성군 홍동면 일부로 이전하여 신도시명을 내포시로 지정 고시했다. 위와 같은 역사적 고증에 의해 합덕읍 서동에서부터 우강면 강문리로 연결된 도로명을 버그내 내포길(로)로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참고:서울시가 중종 17년(1522년) 화계사를 삼각산 부허동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계(華溪)란 동내이름을 따서 화계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화계란 지명이 480년이 넘었는데 이번 도로주소명에 덕릉로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덕릉은 조선 세조의 아버지 덕흥부원군의 묘를 덕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왕이 아닌 자의 묘를 릉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주민의 반대로 덕릉로로 지칭했던 것을 화계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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