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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8 - (사)인천풍물연구보존회 노종선 회장] “풍물에 녹아든 가을들녘의 황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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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상쇠우, 놀이패 풍물에서 활동
풍물에 빠진 풍물장이 인생 40년

 

[편집자주]  지역에 교육기관이 부족한 탓에 학창 시절부터 타지 생활을 시작해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출향인들이 밀집된 지역을 찾아가 그들이 활동하는 모습과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출향인들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노종선 회장은
     -송악읍 기지시리 출생
     - (사)인천풍물연구보존회 회장
     - 인천청소년풍물단 단장
     - 인천 연수구 구립풍물단 예술감독
     - 인천국악협회 부지부장
     - 재인당진시민회 예술부장
     - 재인송악읍민회 부회장
     - 당진전통연희단 ‘나’ 대표 및 예술감독

 

 

 

금파(金波). 가을들녘의 황금물결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사)인천풍물연구보존회 노종선 회장의 농악하는 모습을 보고 공주교대의 한 교수가 직접 지어 준 아호다. 그의 풍물 속에는 가을들녘의 풍요로움과 여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노종선 회장은 풍물에 인생을 건 국내 대표 풍물장이 중 하나다. 송악읍 기지시리가 고향인 그는 1985년 혈혈단신으로 인천에 정착해 인천 최초의 사물놀이팀을 창단하는 등 풍물에 인생을 바쳐 왔다.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 ‘당진상쇠우’

현 당진문화원에 위치해 있던 설성중학교에 농악부가 창단되면서 그의 농악 인생도 시작됐다. 농악부에 들어가 민속예술경연대회 충남대표로 출전하는 등 풍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풍물에 몰두하던 중 무용을 전공한 충남 예총 이미란 지부장으로부터 신선한 제의가 들어왔다. 무용을 배워 보지 않겠냐는 제의였다. 무용을 함께 배우며 설장구, 상고놀이 등도 연습을 쉬지 않고 해왔다.
성인이 된 그는 ‘당진상쇠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진상쇠우에서 전국에 이름을 날리며 전성기를 보냈다. 70년대 중반 당진풍물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며 백제문화제 농악경연대회 등 각종 전국대회 우승을 휩쓸어 타 지역 농악대로부터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진상쇠우’하면 전국에서 알아주던 시절이 있었죠. 백제문화제 농악경연대회 25~28회 우승을 휩쓸다 보니 당진상쇠우가 출전하면 참가하지 않겠다는 팀들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는 이밖에도 당진에서 무료 풍물캠프를 열어 지역민들에게 풍물에 대한 교육도 진행해 왔다.

인천에서 결성한 ‘놀이패 풍물’

많은 풍물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생활고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70년대에는 풍물만으로는 밥먹고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한 해에 행사도 2~4회 정도로 적어 경제성이 다른 직업에 비해 많이 떨어져 풍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기”라고 말했다.
그렇게 당진에서 활동해 오던 그는 인천에서 사물놀이팀을 만들어 보는게 어떻겠냐는 예산 출신 국악연주가 이광수 씨의 제안을 받게 된다. 인천으로 상경해 당진에서 함께 풍물을 하던 친구들과 사물놀이팀을 구성한 그는 ‘놀이패 풍물’이란 이름을 지어 활동하게 된다.
틈틈이 연습해 왔던 무용과 사물놀이를 접목해 복합장르의 사물놀이를 선보이며 인천의 한 기획사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도까지 TV 국악프로 및 쇼프로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래도 배고픈 풍물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각종 행사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적은 수입을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과 나누다 보니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죠.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각종 행사들이 많지 않았고 경제상황도 풍요롭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죠.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의 길을 찾아 친구들과 팀을 해체하게 됐습니다.”

인천풍물연구보존회 창립

풍물팀을 해체한 노 회장은 각종 무대에서 단신으로 공연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무대에서는 공연을 하고, 학생들에게는 농악을 지도하고, 시간이 남을 때면 농악의 무대화를 위한 각종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현재 풍물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된 시기라고 생각해요. 무용도 함께 연습하다 보니 인연이 닿아 인천시립연정국악원 김천웅 선생님의 추천으로 궁중무용을 배우며 사설 무용학원을 개원해 운영도 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이 시기가 그에게는 방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풍물도 무용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의 결정은 풍물이었다. 우리 민족의 창조적 놀이문화인 풍물놀이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풍물 고유의 연희적 특징을 보급·보존하겠다는 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인천풍물연구보존회를 창립해 젊은 인재 육성에 힘을 쓰기 시작했고 풍물을 통한 청소년 선도에도 앞장섰다. 인천풍물연구보존회 창립 이후 한가위 풍물 큰잔치, 무대공연작품, 사회단체지원사업, 사회문화예술교육, 청소년 방과 후 학교,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비 취타대 구성 등 각종 사업을 진행하며 인천전통문화 발전의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노 회장은 풍물인생 40주년을 맞아 고향 당진에서 기념공연을 가질 계획이다. 일향(一向)이라는 주제로 오는 7월20일 오후 7시30분부터 당진문예의전당 소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최근에는 당진전통연희단 ‘’에서 대표 겸 예술감독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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