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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을 가다 29 송악읍 기지시리
열두장 서고, 우시장이 열렸던 기지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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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를 이어온 기지시줄다리기의 마을

▲ 행복경로당으로 지정된 기지시리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시작한 ‘경로당을 가다’가 농번기로 넘어오면서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70, 80대 어르신들도 평생 업으로 삼았던 농사에서 손을 놓지 못 했기 때문이다. 농촌에 젊은이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여전히 경로당은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른 아침 일찌감치 논과 밭을 둘러보고 햇볕이 강렬해지는 한 낮에는 경로당에 모여 한 숨을 돌리고 농사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마을회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기지시리
기지시줄다리기의 마을

송악읍 기지시리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줄다리기가 조선시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마을이다. 지난 2010년부터 매년 기지시줄다리기가 축제형식으로 열리고 있으나 이전에는 윤년 3월초에 치러져 왔다.
“옛날에 기지시리에 이런 저런 안좋은 일이 많았다는 구만. 마을에 악재가 계속되던 어느 날 한 선인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마을의 지형을 보고는 윤달이 드는 해에 주민들이 극진한 정성으로 당제를 지내고 줄을 다려야 모든 재난을 몰아내고 태평하게 살 수 있다고 일렀다는 거여. 그래서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줄을 다리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거지.”
기리시리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은 “어릴 적에는 윤달이 든 해가 되면 어른들이 다 같이 모여 줄을 다렸고 기지시장터에 난장이 서면 당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방에서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들썩였다”고 회상했다.
“국수봉에 당집이 있었어. 지금 있는 당집은 예전 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 새로 지은 거야. 원래 있던 당집에는 큰 바위가 있어서 항상 바위 앞에다 제를 지낼 때 쓸 술을 담갔지.”

▲ 대동우물
틀처럼 생긴 못이 있는 마을

기지시리라는 지명은 틀처럼 생긴 못이 있다 하여 붙었다는 설과 줄을 틀어 꼬는 마을에 샘이 있다하여 이름 붙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기지시리는 최근 10년 사이에 빌라와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자연부락이 18개 반으로 나뉘었다. 그 중 1반은 샘건너, 흥척동, 연방축, 숯굴미, 가장골 등으로 불리는 자연부락이 합해져있다. 그 중에서도 흥척동은 옛날에 흥척사라는 절이 있어 이름 붙은 곳으로 매년 기지시줄다리기 축제 때마다 용왕제가 치러지는 대동우물이 위치해 있다.
“우리 젊을 때까지만 해도 기지시내 사람들은 모두 대동샘 물을 길어다 먹었어. 안틀모시, 기지시리라는 지명에 나오는 샘이 바로 대동우물을 일컫는 거지.”
숯굴미라 불리는 골짜기에는 옛날에 숯을 굽던 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이 들어선 부근이다.
그 밖에도 3, 4반에 걸쳐 있는 틀모시, 9, 10반의 안틀모시, 구억말, 공쟁이 등의 옛지명이 내려오고 있다.

▲ 시장안으로 버스가 다녔던 길
기지시장을 중심으로 발달

전형적인 농촌사회였던 옛날 당진에서도 기지시리는 농사를 짓는 농민보다 장사를 하는 상인이 더 많은 동네였다.
“열두장(한달에 열두번 장이 서는 시장)이 설 정도로 큰 시장이었지. 5일마다 한번씩 장이 서는 당진장보다 더 번화했던 시기가 있었어.”
“말해 뭐해유~ 기지시는 한양을 가던 거점이었당께. 홍성, 예산, 서산 등에서 서울에 가려면 한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평택으로 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지. 그 길목에 기지시가 있었어. 경상도의 문경새재 같은 곳이었지.”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은 “기지시장에는 인근 성구미나 한진포구에서 잡아 올린 생선들을 비롯해 각종 농산물은 물론이고 근방에서 우시장이 가장 크게 섰었다”고 회상했다.
“평택에서도 배로 소를 실어와서 기지시 우시장에서 팔 정도였지. 없는 게 없었어. 전국 보부상들이 다 모였던 곳이니까.”
하지만 80년 말부터 5일장으로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사라졌다.

▲ 마을회관 앞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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