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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입력 2012.09.28 16:47
  • 호수 928

경로당을 가다 32 신평면 금천1리
면사무소, 은행,우체국, 파출소 자리한 면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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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부터 오일장 서는 금천1리

▲ 왼쪽부터 이창희(77), 장재봉(77), 김동현(81), 정진형(77), 임은순(68), 한순자(69), 이계수(78), 천순예(74), 송영애(80), 장정수(78), 노인회장 유철규(78)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시작한 ‘경로당을 가다’가 농번기로 넘어오면서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70, 80대 어르신들도 평생 업으로 삼았던 농사에서 손을 놓지 못 했기 때문이다. 농촌에 젊은이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여전히 경로당은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른 아침 일찌감치 논과 밭을 둘러보고 햇볕이 강렬해지는 한 낮에는 경로당에 모여 한 숨을 돌리고 농사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신평시장 전경.
신평면사무소를 비롯해 각종 은행과 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밀집해 있는 금천1리는 오래전부터 신평면의 중심 마을이었다. 최근 거산리에 위치한 학교 근처에 아파트와 상가가 대거 들어서면서 생활권이 거산리로 집중되긴 했지만, 여전히 공공기관은 금천1리에 자리하고 있다.
금천1리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의 말로는 금천1리가 면소재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 시대 이전부터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 신평시장이 들어섰어. 그 뒤로 면사무소도 지금 자리로 옮겼지. 이전에는 지금 경로당 뒤에 면사무소가 있었어. 경찰지서도 경로당 부근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간 것이고.”
“이전에 신평장과 면사무소 부근은 야산자락에 집 몇 채 정도만 있었지. 한정리 사는 부자들이 신평시장을 세우고 면사무소도 옮겼지.”
금천1리 경로당 뒤편 전 면사무소 터에는 나무와 풀이 우거진 사이로 이전에 사용했던 계단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신평면사무소 전경.
2일과 7일마다 열리는 신평장

금천1리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신평시장이 들어선 이후부터였단다. 해방 이후 들어선 신평시장은 6.25 전쟁 이후에도 변함없이 운영됐다.
“신평장이 서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걸어서 합덕 버그네장을 이용했었지. 그러다가 신평장이 들어서니 신평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강 소들강문 사람들도 신평장을 이용했었어. 당진에 있던 우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크진 않았지만,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생선도 풍성했고 길을 따라 품목장도 크게 섰었지.”
“흙길 위에 마차가 다니던 시절 아니여. 지금이야, 깨끗하게 포장되어서 흙먼지 날릴 일이 있나. 그래도 여전히 신평시장 길이며 위치는 변하지 않았지.”
신평시장은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2일과 7일에 5일장이 열린다. 당진에는 현재 합덕과 신평, 당진에 전통장이 선다.

▲ 면사무소 내에 있는 소나무는 일제시대 때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논농사 위주, 노인 인구 증가

금천1리는 장이 서는 면소재지이지만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비율이 높다. 농사는 논농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밭작물로는 감자와 각종 채소가 주를 이룬다. 20여년 전만해도 담배농사를 짓는 가구가 월등히 많았지만 현재는 100여가구(아파트 및 다가구주택 제외) 중 2가구만 담배농사를 짓는다. 한 여름에 작업이 이뤄지는 데다 수작업이 많은 담배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금천1리 역시, 아파트 거주자들을 제외한 자연부락에는 노인인구 비율이 높다. 노인회에 등록된 인구만 해도 72명이다.  

▲ 신평초등학교 전경.
평의 대표산 망객산 자리해

금천리는 옛날 시냇가가 있어 쇠내, 시내, 금천리로 불리었단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부터 5일장이 서기 시작한 뒤로는 시장, 장뻘, 장터라 불리기도 했다.
시장이 서고, 면사무소를 비롯한 공기관이 밀집해 있는 곳이 3반이다.
신평시장으로 가는 도로와 국도 34호선인 삽교천으로 가는 외곽도로가 분기되는 곳 부근에 한양다리가 있는데 이 부근이 1반이다. 예전부터 이 다리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양씨가 동편에는 한씨가 집단으로 거주했다고. 2반은 망객산 산줄기가 활처럼 휘었는데 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안터라 불린다. 4반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면사무소가 자리했던 곳이라 하여 구면소라 불린다. 5반은 미루리라 불리고 6, 7반은 아파트와 빌라가 들어서면서 분리되었다.
금천1리에는 망객산이 솟아 있다. 망객산은 조선시대 이인 김복선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망객산은 객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하여 이름 붙었다.

▲ 일제시대 이전 면사무소 자리.

 

▲ 노인정에서 바라본 금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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