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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국내 자원 및 광물 연구에 바친 30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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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초등학교총동문회 고인세 사무총장

 - 고산초등학교 20회 졸업
 - 동인천중학교 25회 졸업
 - 동인천고등학교 23회 졸업
 - 인천대학교 토목공학과 졸업
 - 한밭대학원 토목공학과 졸업
 -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광물자원연구본부 근무
 - 고산초등학교총동문회 사무총장
고산초등학교총동문회 고인세 사무총장은 고대면 당진포리 출신으로 고산초등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자전거도 버스도 흔하지 않던 시절, 어린 나이에 제 몸만한 책보를 등에 메고 통학을 하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로 여겨질 일이지만 지금 세대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약6~8km 떨어진 학교를 걸어서 통학했다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통학길 고향의 추억

통학길이 힘들 때면 때 맞춰 지나가는 버스를 세워 무료로 탑승을 하는 일도 있었다. 운전사가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면 허탕을 치는 날도 많았다.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버스비를 내고 당당히 통학을 할 상황이지만 당시는 대다수의 가정이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비를 아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운전사 아저씨가 승차거부를 하면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친구들과 커다란 돌을 가져다 놓고 운전에 방해되도록 심술을 부리기도 했죠. 정말 운전에 방해될 만큼 큰 돌을 옮길 수 있는 힘은 없었지만 우리들 나름대로 통학길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였죠.”
고 사무국장에 따르면 당시 고대면은 교통 및 전기시설 등이 매우 불편했던 지역이었다. 변변한 도로라고 불릴만한 길도 없었고 차량이라고는 하루에 몇 번만 왕래하는 버스가 고작이었다.
“책보를 등에 메고 항상 뛰어 다녔죠. 친구들과 함께하는 등굣길에 서로의 숙제를 공유하기도하고 걷다가 지치고 땀이라도 흐를 때면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휴식도 취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일까 어린 시절 기억에 고대면민체육대회에서 당진포리 사람들이 달리기만큼은 매번 1위를 차지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운동 삼아서라도 매일 같이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왕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웃음)
교통이 불편했던 지역인 만큼 출생신고가 늦는 일은 다반사였다. 한 집안의 가장이나 어른이 바쁜 일이 있어 깜빡할 때도 많았고 면사무소에 나가는 일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특히 당시에는 신생아가 앓을 수 있는 각종 병에 대한 예방·치료 등이 쉽지 않아 첫돌을 넘기지 못하는 일도 많았던 시기였다.
고 사무총장은 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을 떠났다.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지리적 여건 상 당진으로의 진학보다는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진포리는 당시만해도 배가 들어와 서산, 인천으로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갔다. 8남 5녀의 가정에서 태어났던 그는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누나의 집에서 동인천중·고를 다니며 학업에 전념했다.
“당진포리까지 배가 들어오던 때에는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다 주말이나 저녁시간에 당진을 들어오기도 편했죠. 오히려 육로를 통해 당진으로 학교를 다니는 게 비용도 더 들고 불편할 정도였으니까요. 주말이면 집에서 가져가는 음식이며 각종 물품들을 실어 나르는데 배만한 운송 수단도 없었죠.”

잦은 출장으로 자녀에게 미안함 많아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국립광물지질연구소에 근무하게 됐다. 그는 89년도 대전으로 발령받아 전국의 자원·광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직업상 국내 많은 곳을 다녀야만 했다. 마음처럼 땅 속의 광물을 척척 조사해 낼 수도 없었고 각종 자료를 통해 시추 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변수가 있기에 사업의 성과를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는 30여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동료 직원들과 함께 각종 자료를 취합하고 의견을 조율해 보다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만큼 출장도 많은 직업으로 인해 각종 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국내 곳곳에서 지하자원을 개발해야 했다. 교통편이 좋지 못한 곳에 출장을 떠날 때면 보름에서 많게는 한달 간 자리를 비울 때도 많았다.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는 그는 자녀들이 한창 자라날 무렵에도 업무로 인한 출장이 많았다. 출장에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면 새카맣게 탄 자신의 모습에 낯설어 하던 자녀들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고.
“당시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많이 비웠죠.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우는 즐거움을 한창 느낄 때였는데 섭섭함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을 한번 안아보려고 할 때면 겁을 내며 울 정도 였으니까요. 지금은 성인이 되어 가며 좋은 부녀관계를 갖고 있지만 당시에 더 잘해주지 못했던게 많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최근 고 사무총장은 고산초등학교총동문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양성 및 모교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 사무총장은 “지난해 총동문회 이항재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동문들의 많은 노력으로 모교가 폐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각종 장학사업 및 교육사업 등을 통해 교내 학생 및 병설유치원 학생 수를 늘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특히 고산초등학교의 풍물패가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어 학생들의 1인 특기 교육으로 육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 또 기타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문화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총동문회에서 사업을 구상 계획 중이다.

[편집자주]  지역에 교육기관이 부족한 탓에 학창 시절부터 타지 생활을 시작해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나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출향인들이 밀집된 지역을 찾아가 그들이 활동하는 모습과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출향인들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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