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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을 만나다 14] 대원정밀공업(주) 황선경 대표이사
정미소집 아들 전문경영인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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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마음으로 화합 이뤄야”
노력이 불러온 성공의 기회

>> 황선경 대표는
 - 당진 면천면 출생
 - 면천초등학교 졸업
 - 면천중학교 졸업
 - 당진정보고등학교 졸업
 - 1974년 대원강업(주) 공채 입사
 - 1983년 대원강업 기획과장
 - 1987년 대원강업 감사
 - 2010년 대원정밀공업(주)
   대표이사 취임

“명심보감에 따르면 만사종관 기복자후(萬事從寬 其福自厚 : 모든 것에 너그러움을 따르면 그 복이 스스로 두터워 진다)라 했습니다. 경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직원들을 귀하게 여겨, 직장을 평생 행복의 원천이 되는 곳으로 만들어 섬길 수 있게 하는 게 곧 경영이죠.”

대원정밀공업(주) 황선경 대표이사는 면천면에 위치한 작은 정미소집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할 것 없이 유년기를 보낸 그는 중학교 졸업 후 1년 간 아버지를 도우며 정미소를 운영했다. 5월이면 보리와 밀을 우마차로 수거해 방아를 찧는 작업을 도맡았다. 작업을 마친 뒤에도 곡식을 배달하는 일은 황 대표의 몫이었다.

 

힘들었던 정미소 일, 인생 전환점

수확기가 되면 주문이 한 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한 달이 넘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곧 가을이 왔고 벼를 수확하면서 바쁜 일과는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힘든 일을 하면서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당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지금의 대원강업에 입사했습니다.”
황 대표이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4년도는 한국의 산·공업이 서서히 발전하던 때였다.

 

업무와 공부하며 밤낮 없이 노력

황 대표이사가 대원그룹에 몸담은 지도 벌써 39년 째다. 한 직장에서 오래도록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직원으로서 부족함 없는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란다. 비록 고등학교 졸업이었지만 성실히 일하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업체 내에서 중요한 일들 배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점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며 일하는 동안 황 대표 주변에는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학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움이 불필요한건 아니었다. 늦은 나이었지만 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해 업무와 병행하며 공부했다. 회계를 전공하다보니 많은 회계사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겨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아가며 회계공부에 전념했다.

근무시간에는 업무에 충실했고 퇴근과 동시에 회사에 남아 새벽 1시까지 공부했다. 늦은 시간에 잠시 눈을 붙인 뒤 새벽 5시에 일어나 맑은 정신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면 다시 출근을 했다. 반복되는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정을 소화해 냈고 결국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어려운 시간이었죠. 그 시간동안 참고 기다려준 가족들에게도 감사해요. 일과 공부에 매달려 집에도 오지 못하는 가장을 어느 누가 묵묵히 바라봐줄 수 있겠어요.”(웃음)

 

협력회사 업무점검까지 직접 진행

그의 노력 때문이었을까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인도, 폴란드, 러시아, 미국을 대상으로 대원강업의 공장을 설립하는 실무를 담당하게 됐다. 기회는 성공을 불러왔고 대원강업은 연간 1조 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이렇게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고 회사의 주요 직책들을 두루 거치며 황 대표이사는 대원강업의 자회사인 대원정밀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현재 황 대표이사가 운영 중인 대원정밀은 국내 안산, 발안, 경주 등에 사업장 4곳을 운영 중인 기업으로, 해외 진출까지 앞두고 있다.
대표이사직에 오른 그는 회사의 작은 일 하나까지 손수 챙긴다. 직원들의 애경사는 물론 협력회사의 업무점검까지 직접 진행한다. 대표이사라는 직책에도 발로 뛰는 업무를 하다 보니 업무 능률이 높아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시작해 경영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배울 수 있는 게 더 많았죠. 자신의 일에 열의를 갖고 항상 나보다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면 그 복은 다시 돌아 온다고 생각해요.”

<편집자주> 서울을 가려면 차로 5~6시간을 가야했고 인천은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시절, 교육환경이 열악했던 고향을 떠나 타지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른 지역에 정착했지만 언제나 고향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출향인들을 만나 지역에 소개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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