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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5.01.16 20:37
  • 호수 1043

[독자투고] 복지겸 생가 복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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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철 (사)복지겸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복학사(복지겸 장군의 부친)가 당나라에서 약 872년 경 우리나라로 귀화한 뒤 복지겸을 낳았습니다. 지금도 이방인이 타관살이를 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사람들이 얕잡아 보는 판인데, 당시에는 생활고에 언어소통도 더욱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살기 힘들어 아미산 밑 면천성의 북쪽인 성북리에서 숨어 살았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2005년 9월 15일 성북리 전 728번지에 복지겸 장군 생가지 복원을 위해 충남발전연구원에서 발굴비 2500만 원을 들여 발굴 작업에 들어가 당시 사용하던 토기 1점이 발굴됐습니다. 이는 옛 농촌지도소에 보관 중입니다. 또한 토담집 주춧돌이 현명하게 나타났는데, 고려시대 기와 및 큰 집터가 없다 하여 그대로 덮고 말았습니다.

그 후 생각해 보니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이 무슨 큰 집을 갖겠으며, 또한 기와집에 생거표시가 없다며 발굴비만 낭비한 충남발전연구원의 역사 학자들이 한심스럽습니다. 타국에서 온 사람이 토담에 사는 것도 기적이며, 제가 어렸을 때까지도 기와집이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고려 초전에 타국인이 기와집에서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타관살이가 심했던 복지겸은 어린 시절 말 타고, 활 쏘고, 칼 쓰는 법을 배워 위력을 과시하다가 궁예에게 발탁돼 장수가 되고 고려 개국에 일등공신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구나 늙으면 고향을 찾듯 복지겸장군도 고향 면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면천성에 거주했을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은행나무와 두견주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복지겸의 처가가 성북리 아미산 자락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바, 그가 태어난 성북리 전 728번지에 조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면천에는 99칸 집으로 두견주 전수관을 지어 이를 연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순성면민들과 면천면민들은 힘을 합해 고려 개국 축제를 당진의 문화제로 부활시켜야 할 것입니다.
심훈 선생이 잠시 머물며 글을 썼던 필경사를 보존하고, 당진시에서는 심훈상록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또한 성남에 있던 남이흥 장군의 묘를 도이리로 옮겨, 매년 충장사에서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열고 있지만 이들은 우리 당진과 연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가 충남 논산에서 살았는데, 살던 집을 문화재로 지정하려 했을 때 논산시에서는 논산은 출생지가 아니라며, 잠시 살았던 곳뿐이라면서 생가에 가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진시는 논산시와 같이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궁예의 폭정으로 더 이상 그를 군주로 모실 수 없으니 복지겸·배현경·홍유·신승겸·박술희(왕건과 의형제)가 왕건을 찾아가 군주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개국공신 5명 중 복지겸과 박술희가 당진 사람인만큼 고려 개국 축제를 당진에서 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성면민과 면천면민, 그리고 당진시는 고려 개국 축제를 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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