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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0.09.25 00:00
  • 호수 339

“면천면 몽산은 백제부흥운동기 제2 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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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면 몽산은 백제부흥운동기 제2 도읍이었다”
재야사학자 박성흥 옹 “당시 항전 사적지 대부분 당진” 주장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패망한 이후 백제땅에서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전이 663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왕으로 추대된 의자왕의 아들 ‘풍‘은 왕도를 주유성에 정하였다.
서기 662년 풍왕은 ‘주유성이 적을 막기에 적합하나 전답에서 멀고 토지가 척박하여 오래 머물면 백성이 굶주리게 된다’며 피성으로 왕도를 옮긴다.
그러나 신라군의 공격으로 사평성을 비롯한 4개 성이 함락되자 풍왕은 663년 2월 다시 주유성으로 왕도를 옮기게 된다.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같은 해 8월 신라군은 주유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당나라에 중위군 파병을 요청, 그 병력 중 군선 170척이 백촌강에 전열을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일본군선이 여기에 이르러 회전, 일본군이 참패했다(백촌강전투). 결국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지도층은 그해 9월 일본군선을 타고 일본에 망명하게 된다.」
백제부흥운동의 역사는 바로 이 3년 동안의 일이다.
재야사학자 박성흥 옹은 이 백제부흥운동의 전적지가 홍성과 당진에 이르는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옹의 주장에 따르면 주유성에서 도읍을 옮겼던 ‘피성’이 바로 면천의 ‘몽산 산성’이다. 박 옹은 그 근거로 피성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가졌다는 ‘고련단경수’가 현재의 ‘승전목’과 일치하는 등 주변환경이 동일한 점, 홍성 주유성과 걸어 하루 거리인 점 등을 든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에는 고대면 대촌리에 당나라군대에 패망한 일본군 1만명의 시신을 묻은 ‘막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곳 대촌리 사람들은 이 근처를 ‘맹무덤밭’ ‘맹무덤배미’ 등으로 불러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매립되기 이전에 해안가였던 곳이기도 하다.
박 옹은 또 기록에 남은 백촌강전투의 주요정박지 지명인 손량(장항교밑 실제지명), 백사(장고항리 용무치-삼봉리 곰개), 장암(삼봉리 차돌배기마을 황새바위까지의 긴 암맥) 등이 당진의 지명이나 실제지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백촌강은 흔히 알려진 대로 백마강 일대가 아니라 고대. 석문. 송산 사이의 해안(지금은 매립된 석문공단부지)일대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 옹은 주유성 함락 후 백제의 지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일본군선을 기다렸던 곳이나 그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일본군선이 입항한 곳, 일본을 향해 떠난 곳이 송악면 정곡리의 배울마을과 돌무지항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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