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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일이 아녜요. 우리 모두 피해자일 뻔 했다고요”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만나다 (합덕읍 운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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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딸 아이를 잃은 엄마 “죄책감에 살아”
“잊혀지면 다시 또 이런 일이 생기겠죠”

“대전에 살 때였어요. 결혼 후 첫 딸을 낳았죠. 아이를 위해 좋다는 건 다 해주려고 했는데….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요.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합덕읍 운산리에 사는 김선영(가명) 씨는 지난 2005년 결혼했다. 첫 아이가 2006년 3월에 태어났다. 건조한 봄이었기 때문에 가습기가 필요했고, 큰시누이가 사용하던 가습기를 물려받았다. 시누이는 가습기를 전하면서 자신은 귀찮아서 잘 쓰지 않았다며, 사놓고 다 쓰지 못한 가습기 살균제 ‘옥시싹싹’ 한 통 반을 함께 줬다.

김 씨는 행여 갓 태어난 아기가 감기라도 걸릴세라 열심히 가습기를 틀어댔다. 당시 가습기 내부에 세균이 많이 증식할 수 있다는 얘기에 가습기 살균제도 살뜰히 챙겼다. 남편은 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고, 내내 아기와 함께 있던 김 씨는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방에 잠든 아이를 두고 집안일을 했다. 잠든 아기 곁엔 늘 가습기를 틀어놨다.

폐 굳고 장기 파열
그렇게 약 10개월이 흘렀다. 아이가 기침을 하고 감기에 걸린 듯해 소아과를 찾았다. 병원에서 지어 주는 약을 먹였다. 그러다 2007년 1월 친정아버지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옆에 있던 친청엄마가 “얘, 아이가 좀 이상해”라고 말했다.

 

감기 기운 때문에 기운이 없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친정엄마는 김 씨 등에 업힌 아이가 ‘끙끙’ 대며 숨을 쉰다고 했다. 부랴부랴 찾아간 병원에서는 아기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하고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보였다. 다시 대전으로 내려와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아직 돌도 안 된 아이 코에 산소 공급 호스를 끼우고, 산소포화도를 확인했다. 정상적인 수치가 아니었다. 산소포화도가 급감해 입원 바로 다음날 중환자실로 옮겼다.

엄마 품에서 젖도 먹고 잠을 자야할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꼽고 홀로 누워 있었다. 하루 두 번 밖에 면회하지 못하는 탓에 중환자실 밖에서 몇날며칠을 지냈다. 주사를 놓을 때면 울어 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여러 차례 수면제를 투여한 아이는 간신히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쉴 뿐,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로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었다. 잠깐의 면회시간 동안 김 씨는 아이의 눈을 감겨주고,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일 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X-ray를 찍을 때마다, 아이의 폐가 점점 굳어가는 모습만 보였다. 지난 10개월 동안 젖을 잘 먹지 못해 말랐던 아이는 몰라보게 부어 있었다. “차라리 저게 다 살이었으면…. 포동포동하게 오른 젖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담당 교수는 “이런 케이스가 있기는 했지만 병명을 모르겠다”며 “학회에서도 몇 번 논의된 적은 있는데, 원인도 모르고 현재로서는 치료법도 없다”고 말했다.

입원한 지 열흘 만에 아이는 떠났다. “이제 그만 떠나 보내주자”던 의사에게 “한 번만 안게 해달라”고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이후 한 번도 아이를 안아보지 못했다. 폐가 제 기능을 못해 숨을 쉬지 못하자 내장은 다 파열됐고, 붓기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아이는 이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몇 차례 심장이 멈춰 심폐소생술을 했었던 것인지 아이의 여린 가슴은 벌겋게 멍이 들어 있었다.

4년 만에 죽음의 이유를 찾다
그 이후로 가족들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다.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저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다. 그러다 4년이 지난 2011년 어느 날, 막내 시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니, 혹시 가습기 살균제 때문 아닐까요..? 언니, 그거 썼잖아.”

지금처럼 크게 이슈가 되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사건을 접하고, 아이의 사망기록 관련 서류를 떼 녹색소비자연대, 한국소비자연합, 환경보건시민센터 등에 제출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를 수차례 준비해서 각 단체별로 제출해야 하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나 힘들었다. 다시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했고, 변호사를 통해 합의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지 막연한 상태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김 씨는 결국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합의서에는 “다시는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김 씨는 “그땐 너무 어려워서, 너무 힘들어서 합의했는데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면서 “그때 합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딸의 죽음을 판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며 고통스러워했다.

대기업 제품 이럴 줄이야…
사건 이후 김 씨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공기 중에 쉽게 퍼지는 스프레이나 분무기 등 분사형 제품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성분을 꼼꼼히 읽어보는 것도 습관이 됐고, 되도록 베이킹파우더나 구연산 등 천연재료를 활용한다. 깨끗해 질 거라고 믿고 산 대기업의 제품이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뒤로는 모든 게 의심스럽다.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 김 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데도 여전히 슈퍼나 마트 어느 곳에 가도 제품을 볼 수 있다”며 “제품이 버젓히 판매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고 허탈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에겐 이 문제가 자신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서운함마저 든다.

하지만 결코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일어난 남 일이 아니다. 집은 물론 병원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가습기를 사용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 씨와 같은 극단적인 일을 겪지 않았을 뿐이지, 판매 분석 결과 무려 1000만 명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두려운 건 이렇게 이슈화 됐다가, 다시 잊혀지는 거예요. 그럼 또 이런 위험한 제품들이 판매될 거고, 또 이런 피해자가 나오겠죠. 전 국민이 죽음에 노출됐던 것이나 다름없던 일이예요. 나와 내 자식, 내 가족이 당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요. 제발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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