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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조재형 시인
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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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찾아 나섰던 젊은 날의 방황
좋은 글이란 ‘몸으로 쓰는 것’

 

붓으로 밭을 일궜던 심훈 선생처럼 조재형 시인은 땅을 일구며 시를 짓는다. 에너지의 근원인 땅, 그 속에서 씨앗이 움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시다. 농부의 삶에는 시가 있다.

“논에 잡초가 자라는 데 뽑질 못하겠더라고요. 아무리 잡초라 한들 그 어린 싹을 뽑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마냥 두다 보면 너무 자라버려서 또 손을 댈 수가 없고…. 그런데 풀과 작물이 서로 경쟁하면서도 어우러지며 알아서 잘 자라더라고요.”

조재형 시인이 고향에 내려와 농사지으며 산 지 어느덧 13년째다.

꿈 잃은 소년 윤동주를 만나다
축구선수를 꿈 꿨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엔 축구부가 있는 학교가 당진지역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보내 달라 떼를 쓰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꿈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시였다. 국어시간에 우연히 만난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침 그의 누나가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도우미로 일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당시에 읽었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은 평생 가슴에 남는 작품이다.

그렇게 문학인이라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 윤석영과 함께 “나는 출판사를 운영할 테니, 너를 글을 써서 당진을 대표하는 2인 문단시대를 열자”고 다짐했고, 조재형 시인은 경영학과를, 윤석영 씨는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조 시인은 “함께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지가 있어 행복했다”며 “꿈을 키워나가는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스승 찾아 방황하던 청년
1980년대 그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 사회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길 위에 섰다. 그 역시 시위를 하다 붙잡히길 몇 차례, 특수학적변동자(학변자)로 강제 입대해 고문과 학대에 가까운 구타를 당했고, 제대 후에는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문학의 스승, 인생의 스승을 찾아 나섰다. 하일 시인의 <주민등록>이라는 시를 읽고 무작정 부산으로 가 시인의 행적을 쫒기도 했다. 그렇게 시인의 삶을 찾아 여행을 하면서 방황 속에 청춘을 보냈다.

인생에 대한 고민, 사회에 대한 고뇌 속에 살며 문학을 유일한 탈출구로 삼았던 그는 출판사를 문 열겠다는 꿈을 접지 못했다.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혀 축구선수의 꿈은 포기했지만, 이 꿈마저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3년 동안 미친놈처럼 돈을 벌었어요. 배추장사, 생선장사 등 안해 본 게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죠. 그러다 무역회사를 운영했는데, 사업이 커 갈 무렵 주 거래대상이었던 일본 바이어가 터무니없는 성접대를 요구하더라고요. 언쟁을 벌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문제까지 얘기가 나왔어요. 결국 거래가 끊겼고, 그 길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산으로 갔어요.”

신대철 시인, 스승을 만나다
큰 산과 절을 다니면서 다시 인생의 스승을 찾아 나선 그는 친구 윤석영의 소개로 신대철 시인을 만났다.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던 신대철 시인을 만난 순간 “이 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무인도를 위하여> 등 당신의 시처럼 신대철 시인은 맑은 사람이었다. 시어 하나하나 읽기가 아까울 정도로 좋았다. 떨어져 있어도, 선생을 생각하기만 해도 배움이 느껴졌다. 운명 같은 끌림.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만났다.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찾아왔지만 제도권 내에서 경쟁하며 살고 싶지 않았던 조재형 시인은 오로지 시와 산에만 몰입해 있었다. 시모임 ‘빗방울화석’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오랜 꿈대로 같은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하던 그는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의 병환으로 서울 생활을 접고 당진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조 시인은 “아버지가 편찮으시기도 했지만,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며 “시골마을, 그리고 고향은 가장 순수한 정서로 시심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좋은 시, 좋은 글이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글이야 말로 대상을 아름답게 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 시인은 황동규, 김수영 시인과 같이 ‘몸으로 시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온몸으로 삶을 살아낸 시인들, 그런 삶 자체가 곧 시이기 때문이다.

문화, 인간성을 회복케 하는 것
조재형 시인은 고향에 내려온 뒤 농사를 지으며 당진시농민회와 당진문화연대에서 활동해 왔다. 올해부터는 당진문화연대 회장직을 맡기로 했다. 당진문화연대는 매달 문화예술 공연 및 강연회를 통해 시민과 지역작가들이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고, 공연 수익금으로 소외된 이웃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진시 문화정책 등을 제언하고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는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넘쳐흘러도 과하지 않은 것이 문화입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일상에 쫓겨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잠시 멈추도록 하는 것, 쉼의 공간을 만들어 삶을 성찰하게 하죠. 기계화된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거예요. 앞으로 많은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문화예술을 접하고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재형 시인은
·1964년 우두동 출생
·탑동초(8회) 호서중(10회) 호서고(10회) 졸업
·계간 <시평> 신인문학상 수상
·빗방울화석 동인
·공동시집 <산늪>,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빙폭>, <금강산에 살다 죽어도>,  
<천지에서 바이칼로>,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산상초원>, <천장호수> 등
·전 한국등산학교 강사     ·전 서울시산악연맹 산악구조대원
·당진시농민회 회원        ·당진문화연대 차기회장

조재형 시인의 詩 한 편

고려인 리마랏의 이야기 <빙하>

흔히들 글쓰기의 어려움을 ‘산고(産苦)’에 비유한다. 그래서 작품 하나하나가 시인에게는 자식과 같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2002년에 쓴 <빙하>는 조재형 시인이 가장 아끼는 시다. 이 시는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 파미르고원에 있는 코뮤니즘봉(7495m)을 등반할 때 만났던 고려인 리마랏의 이야기다.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고려인들은 연해주로 농업 이민을 간 사람들이나, 망명 이민을 떠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그동안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진 채 살아왔다. 여러 나라의 등반가들이 참여한 국제캠프 등반대회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던 리마랏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타쉬겐트라고 말하다가 할아버지의 고향은 창원이라며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리마랏은 물을 길러 오갈 때도 에둘러 한국인 텐트 앞을 거쳐 가며 불편한 점이 없는지, 건강상태는 어떠한지 살폈다. 등반을 마치고 캠프를 떠날 때 건넨 선물을 받아들고 하염없이 흘리던 리마랏의 눈물엔 얼마나 많은 응어리진 한이 서려있던지,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눈물에 온몸이 맺히는 것 같았다고 조 시인은 전했다.

빙하
                - 고려인 리마랏에게

 

밤새 눈이 내리고
빙하가 역류하는 동안
그대는 막사에서
설원과 사막을 오가며
본향으로 가는 길을 내고 있었나요

햇살이 체트록봉을 넘어오기 전
그대가 먼저 빙하 옆을 스쳐갔군요
부식창고에서 식당으로 샘터로 간 발자국은
태극기 펄럭이는 텐트 앞에서 주춤거리다가
멀리 돌아서 국제캠프로 갔군요
까레이스키도 고려인도 아닌
우즈백인으로 살아 보려고
파미르고원 국제캠프 식당에서
양고기를 구워내는 리마랏
고향을 물으면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라고 말하다가
잊혀진 아버지의 아버지 고향으로 달려가며
눈물에 온몸 맺히는 리마랏

그대의 눈물엔
바람과 모래사막을 넘어
그대가 일구어 낸 목화밭이 비치고
그대가 꿈꾸는 창원 논두렁길이 비치고
소리 없이 빙하가 덮어 버리는군요.
그대의 피가 역류할수록
사방에서 빙하가 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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