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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정신이 묻어 있는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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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정신의 묻어나는 집현전

역사적 그날인 3월 20일은 세종이 즉위하는 해에 집현전을 설치한 날이다.

세종은 글을 몰라 억울함을 이야기 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의 이러한 애민정신은 집현전을 통해 표현되었다.

 

창조와 인재경영이 돋보였던 집현전

집현전은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집현전이란 이름은 고려 인종 때 처음으로 사용 되었다. 조선 정종 때까지 집현전이란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세종이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국가기관으로 승격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정책기관이 되었다.

세종은 식녀시라는 과거시험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셨다. 이렇게 뽑힌 대표적 인물들이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등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의학, 역사, 의례, 국방등 전 분야에 걸친 50여종의 책을 편찬하였고, 측우기, 자격루등의 과학기기등도 만들어 세종시대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일하는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한 겨울 집현전에서 밤늦게 책을 읽다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의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처럼 세종은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학자들이 학문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사가 도서제와 특산품인 귤을 하사하었고, 사헌부로부터 집현전 학자들은 자유로울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셨다.

 

뜻을 이어 받다

세종은 혼자 나랏일을 결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현전의 많은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해 그 성과를 나랏일을 결정할 때 활용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성종의 홍문관과 정조의 규장각까지 이어졌다. 기본이 우선이 되고 학문을 중시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훌륭한 정책을 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독선적인 행동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결정하고 연구하는 것은 후대인 우리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기자단 원당초 5학년 송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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