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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네곱창 박선순 씨

남편의 사고와 죽음…눈물로 얼룩진 나날들
자궁암 이형증 “살고 싶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었을 무렵,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어도 곳곳에서 애정을 담은 편지가 하루 3통 씩 오곤 했다. 뜯지도 않은 편지들은 곧장 아궁이로 들어가 땔감이 되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우연히 뜯어 본 편지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게 펜팔을 주고받기 시작해 결혼까지 이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날만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난의 시작이었고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죽지 못해 지난 날들을 살았다”며 “그래도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키 큰 생머리 아가씨

송악읍 부곡리에서 태어난 박선순 씨는 필경사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도 많이 받고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큰 키에 생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멋쟁이였다. 당진을 비롯해 강원도에서도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지 편지가 오기도 했다. 하루는 가슴에 성경책을 안고 교회를 가던 날이었다.

군 복무 중이던 한 청년이 한진 앞 바다로 훈련을 나가다 박 씨를 봤다. 마침 그의 옆엔 박 씨의 동네 친구가 함께 있어 친구에게 10만 원을 쥐어주며 어렵게 박 씨의 집 주소를 얻었다. 그렇게 청년은 박 씨에게 편지를 보냈고 인연이 이어지며 결혼까지 성사됐다.

“1등 하고 집에 와”

결혼의 단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혹독하기만 했다. 주일이었던 그날 아침 남편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남편은 그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저녁이 됐을 무렵 어린 자녀들에게 밥을 해주고 남편과 함께 저녁 예배에 가기 위해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있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는 “그날따라 남편을 꼭 교회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노래방을 가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그럼 1등 하고 집에 오라”며 응원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교회로 향했다.

귓가에 맴돌던 벨소리

찬양단이었던 그가 단상 앞에서 한참 찬송가를 부를 때 자꾸 전화 벨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그와 전화가 있는 곳까지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유독 그날은 전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화를 받기 위해 가면 전화가 끊어지고, 또 전화가 울려 가면 끊기길 몇 차례, 겨우 연결된 전화로 남편의 비보가 전해졌다.

맨발로 밖을 뛰쳐나갔고 그의 뒤에서 차가 크게 클락션을 울렸을 그제야 도로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에 도착하자 하얀 침대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 사이로 남편의 한 쪽 팔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몇 차례 기절했다 깨어나길 반복했다.

“차라리 잘라달라”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새벽 3시 서울 병원에 도착했다. 의사를 붙잡고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아버지 손만이라도 잡고 식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며 오열했다. 수술 끝에 잘린 팔을 봉합했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잘린 팔은 괴사하기 시작했다. 고통을 호소하며 겨우 정신을 차린 남편이 “차라리 잘라 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결국 남편은 왼쪽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남편의 한쪽 팔 역할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과일 장사까지…생계의 어려움

곧 생계에 어려움이 찾아왔다. 한 번도 일 해본 적 없었던 그는 두 자녀를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화장품 방문 판매 일부터 시작했다. 그 후에는 리어카에서 과일을 팔아가며 돈을 벌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궁암 전 단계인 이형증이 발병했다는 것을 알았다. 박 씨는 “그땐 정말 살고 싶지 않았다”며 “무엇보다도 수술할 돈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수술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찾아왔고 그 이후부터 정기적으로 조직검사를 하며 상태를 보고 있다.

이어진 남편의 사망

고대면 당진종합운동장 앞에서 8년 간 오가네곱창을 운영했다. 그 후 지난 2014년 지금의 원당동에 자리를 잡고 이전했다. 하지만 새로운 터로 오가네곱창을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심근경색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편이 떠난 뒤 남겨진 것은 빚뿐이었다”며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몇 번 가지도 못한 동창회에서 동창들이 돈을 모아 장례식비를 마련해줬다”고 말했다.

“손님이 있기에 가능한 시간들”

남편이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그동안 매일 같이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 년 간 오가네곱창을 찾는 손님들도 있었기에, 더 열심히 살고 싶었단다. 현재는 종업원 한 명 없이 혼자 오가네곱창을 운영하고 있다. 생곱창을 들여와 손수 밀가루로 닦아내고, 채소 5가지를 넣어 육수를 넣고 끓인다.

혼자 장을 보고 밑반찬을 만들고, 때로는 200포기에 달하는 김장 김치를 담근다. 그는 “홀로 분주히 일하는 모습에 가끔은 손님들이 설거지까지 도와줄 정도”라며 “이렇게 함께 해주는 손님들이 있어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따뜻한 말을 건네주세요”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외출할 때 립스틱이라도 바르거나 스커트라도 입고 장을 보는 날이면 사람들이 꼭 ‘과부가 바람 났다’, ‘남자 생겼냐’고 말한다”면서 “정말 올 곧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이어 “주변 사람이 힘들어 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제 바람은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아가는 거예요. 작은 카페를 만들어 효소로 만든 차를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싶어요. 카페 옆에는 예쁜 꽃과 식물들을 키우면서요. 언젠가 그날이 오겠죠?” 

<오가네곱창은?>
■주소 : 당진시 정안로 69-76
■문의 : 352-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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