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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 입력 2017.04.28 18:58
  • 호수 1156

정묘호란의 영웅 남이흥 장군
당진지역의 문화재를 엿보다 4
남이흥 장군의 묘역과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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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위에 인조 임금이 곤룡포 덮어 애도
부친·부인 충장사에 함께 모셔
매년 9월 남이흥 장군 문화제 개최

의춘부원군 충장공 남이흥 장군은 선조 9년에 태어나 27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현감, 부사, 목사를 거쳐 중군대장으로 있을 때 적은 수의 군사로 이괄의 반란군을 평정했다. 이에 조정은 남이흥 장군을 1등 공신 종1품을 하사했다. 한편 장군은 아버지인 의천부원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26세에 아버지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말 달리기,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해 27세 나이로 알성무과에 급제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5년 부원수겸 평안감사로 있을 때 후금 3만6000여 명의 대군이 침공했다. 이 정묘호란이 남이흥 장군에게 마지막 전장이 됐다. 안주성 전투에서 3000여 명의 군사로 혼신을 다해 대적했으나 적수가 너무 많아 성 안으로 많은 적을 유인하고 화약고에 점화해 함께 자폭한 것이다. 인조 임금은 장군의 장례 때, 입고 있던 곤룡포를 옥을 관 위에 덮으며 애도했다.

또한 나라에서는 정1품 의춘부원군, 충장시호, 충신정려와 평안도 안주에 사당을 짓고 충민사로 정했다. 또한 안주의 백성들은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심한 가뭄, 역병, 역질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제사와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한편 그의 처 하동 정씨와 아들은 대호지로 내려와 살았으며, 아들은 면천군수로 부임했다. 또한 조정은 대호지면 전역과 천의리, 승산리까지 하사했으며, 그를 기리는 곳인 충장사는 숙종 때 건립됐다. 충장사는 현재 대호지면 도이리에 위치해 있으며, 남이흥 장군과 그의 부친 남유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충장사 내에는 이밖에도 남이흥 장군의 부인 하동 정씨의 묘가 있으며,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영정과 곤룡포, 호패, 고문서 등 남이흥 장군의 유품 500여 점을 보관하는 유물전시관 모충관과 신도비, 유적비 등이 있다.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만 38점에 달한다.
 

※이 기획기사는 2017년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 보도합니다.

 

남이흥 장군에 얽힌 일화
남이흥 장군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당시 억울한 일을 당한 연안 김 씨의 아버지에 대한 누명을 벗겨준 일이 있다. 연안 김 씨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는데 고마운 마음에 수년 동안 남이흥 장군을 쫓아다니며 딸을 첩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했다. 남이흥 장군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돌려보냈지만 연안 김 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첩으로 맞이했다. 이후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화약고에서 적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연안 김 씨는 만삭의 상태로 곧바로 자결했다.

 

[미니인터뷰] 유종인 남기흥 장군 문화제 집행위원장

“남이흥 장군의 정신 본받을 수 있도록”

“남이흥 장군은 우리 고장의 훌륭한 인물입니다. 집행위는 남이흥 장군을 기리고자 매년 9월 충장사 일대에서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남이흥장군문화제의 일환으로 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했는데,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문화제가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이흥 장군 문화제 집행위원회에서는 남이흥 장군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당진시민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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