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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7.06.02 20:27
  • 호수 1161

[시민 칼럼]면천관아의 복원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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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 역사소설가

 


면천읍성은 조선 세종 대 난상토론을 거쳐 완성된 관방시설이다. 당시 정승 황희가 면천보다는 서천이 급하다며 제동을 걸자 사군개척에 공을 세운 최윤덕이 직접 현장을 살피고 충청도 해안 방어기지로 면천을 주자 일사천리로 완성된다. 면천성은 관방시설로 민가가 대규모로 모집된 성이 아니다. 위급 시 주민이 성안으로 대피하는 성격인지라 성의 둘레가 1200m의 소규모 성이다. 조선 초기 쌓은 비인남포성과 비슷하다.

면천성은 평지에 건설되어 면천군의 행정의 중심인 관아와 유향소 그리고 극히 일부의 가옥만이 성내에 있었고 읍민은 성의 남서문 일대에 촌락을 이루어 살았다. 성내에는 동헌, 내아, 질청, 조종관, 반월루, 풍락루, 형옥, 군기고, 사령청, 노비청, 마사 등 40여 동의 각종 시설과 대청나무로 두르고 연꽃으로 가득했던 군자지와 그 위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아름답던 읍성의 모습이 각종 문헌에 보인다. 선조 때 사람 심수경이 노래했던 반월루, 당나라 시인 이구령이 노래한 당시 영주성 남문 원기루에서 취해온 원기루 등 하나 하나 근거를 찾아보면 튼실하고 찰지다. 면천을 오갔던 심수경, 김종수, 박지원, 김윤식 등 조선의 유수한 명사들의 살아있는 에피소드가 면천관아의 복원과 궁합이 맞는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본다.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직한 시간은 37개월이다. 4여 년에 걸친 조선 군수직은 예외적이다. 불과 1년에 불과했던 군수직을 오래도록 한 이유는 박지원에 대한 정조임금의 특명 태문이었다. 강압적이지 않고 서학을 이론으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박지원이 적격이었고 당시 면천이 서학세력이 강했던 탓이다. 연암은 면천에서 많은 성과를 낸다. 그 중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연암은 면천에서 아전 유한집을 주목했다. 연암은 자신의 아들 박종채와 동년배인 유한집의 문재를 알아보고 아들과 함께 학문을 지도했다. 유한집은 훗날 문학으로 성취를 하여 대동시선과 풍요삼선 등 조선의 유수한 시선집에 작품을 수록하는 문인으로 성장한다. 유한집은 훗날 면천에 7년을 유배와 있던 김윤식의 면양잡록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한집의 손자 윤지환이 면천 아전이었는데 할아버지의 시책을 들고 와 평을 요구한 것이다. 유한집의 동생 유학금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박지원이 양양부사로 이임할 때 양양으로 따라가기도 했다. 박지원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고 짙다.

면양잡록을 잘 읽으면 생생한 면천의 역사가 보인다. 당신의 군수, 좌수, 이방, 형방 등의 실명이 등장하는가 하면 당시 영탑사를 왕래하던 승려들의 이름과 삶의 모습이 보인다. 영탑사 아랫마을 사람들의 순박성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단초다. 면천읍성 복원은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면천읍성과 관아복원 사업은 기대되는 사업이다. 그러나 성 안에 저잣거리를 조성하는 것은 제고가 필요하다. 성내에 저잣거리가 있었다고 보는가? 한 면이 300m에 불과한 면천읍성 성격과 구조상 그것이 가능한가? 성내의 상가는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형성됐을 것이다. 조선의 문헌은 면천읍성 남문밖에 백성들이 모여 장시를 이룬다는 정도다. 관광객들의 눈요기와 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한 육의전 같은 저잣거리를 재현한다는 것은 사업의 전도가 바뀐 것이다. 그러함에도 면천읍성의 복원은 기대되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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