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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산책10 민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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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이후 조선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얼마나 많은 민란이 전국에서 일어났는지 역사는 이 시대를 ‘민란의 시대’라고 부른다.

민란은 즉흥적인 성격이 강해 하루저녁 사이에 몇 몇이 모여 쉽게 관아를 공격했다가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작은 고을에서 시작된 민란은 점차 규모를 키워나가 조선조정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 1862년에 시작된 진주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진주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이라는 부패한 관리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경상도우병사에 부임한 이래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는 금액을 농민으로부터 수탈했다. 진주민란에서 드러나듯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패한 관리의 탐학이었다. 이렇게 고을의 수령들이 벌인 탐학은 해당 관리의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조정의 구조적인 병폐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면 보다 명확해 진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조정은 세도정치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왕권강화를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중수하기로 했다. 경복궁의 중수는 쇠약해진 조선의 국력과 재정으로는 진행하기에 무리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대역사였다.

경복궁 중수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을 앞두고 부족한 재원을 확보할 방법이 없자 당백전이라는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 보다 백배 높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 문제는 당백전이 실질적인 가치를 갖는 화폐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백배의 가치를 부여한 화폐였다는 점이다. 결과는 당백전의 발행이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고,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에 빠졌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민중의 몫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의 씀씀이 크기는 점차 커져, 개항 이후에는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광물자원 채굴권을 팔았고, 철도부설권 등 국가의 재산과 이권을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아낌없이 팔게 됐다. 더 이상 팔 것이 없게 되자 결국 관직을 팔아 조정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믿기 어렵지만 1893년 7월 20일자 일본신문 “일본”에 실려 있는 조선 관직의 액수를 보면, 평안감사 80만 냥, 경상감사 70만 냥, 함경감사 32만 냥, 충청감사 30만냥, 경기감사 15만 냥, 강원감사 15만 냥, 황해감사 15만 냥, 전라감사 15만 냥이었고, 유수 8~10만 냥, 병사 10~20만 냥, 목사 부사 15~17만 냥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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