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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지역역사 산책 13
광화문 복합상소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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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취회를 통해 충청감영을 굴복시킨 동학교단은 충청도만큼 탄압이 심했던 전라감영을 상대로 잇달아 삼례취회를 열고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엄청난 수의 동학교도들이 삼례에 모여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요구를 담은 의송단자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전달하였다. 삼례취회에서 의송단자를 전라감사에게 전달한 당사자는 다름아닌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이 동학교단에 등장한 최초의 사건이 바로 삼례취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임금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동학교단에서는 광화문에서 복합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광화문 복합상소란 여러사람이 함께 광화문 앞에서 임금에게 전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것으로 자칫하면 당사자까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광화문 복합상소는 1893년 2월11일부터 3일간 이어졌다. 의관을 정제한 동학도인들이 광화문 앞에서 상소문을 전달하려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당시 상황을 『일본』 신문에는 “수십 명 또는 30명이 복소했다”라고 보도했다. 3일째 되던 13일 오후 국왕인 고종이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 업에 임하라, 그러면 소원에 따라 베풀어주리라”는 답을 듣고 성과 없이 해산했다. 동학도인들이 해산하자 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광화문 복합상소는 교조신원운동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동학교단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임금조차도 동학도인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한편 광화문 복합상소는 내포지방의 동학도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덕의포 대접주 박인호를 필두로 그의 사촌동생 박광호가 광화문 복합상소를 대표하는 소두가 됐고, 수많은 내포지방의 동학도인들이 상경해 광화문 복합상소에 참여했다. 이렇게 광화문 복합상소는 내포지방 입장에서는 전체 동학교단에서 내포지방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날로 높아가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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