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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학교 어린이기자단 <그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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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뫼성지 김정찬 신부님과 품앗이학교 어린이기자단

순교자 집안의 아들 신부가 되다
1845년 8월 17일은 우리나라의 최초 신부인 김대건이 신부가 되기 위해 사제서품을 받은 날이다. 신부로 활동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 순교 했지만 김대건 신부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성인으로 추대될 만큼 큰 영향력을 미친다. 김대건 신부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을 도와주실 분을 만나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성지
7월의 아주 더운 어느 날 우리는 우강에 있는 솔뫼성지로 향했다. 기념관으로 들어간 우리는 김대건 신부의 유품과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전시물을 보고 난 후 인터뷰가 약속된 김정찬 신부님을 만났다.

 Q 김대건 신부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어떤 일을 했나요?"
 A “많은 고생 끝에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조선인으로써 최초의 신부고 박해로 희생된 순교자들에 대해 자료를 모아 후대 신앙인들에게 순교자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한 작업을 합니다. 또한 신학생들을 키우며 활발한 전도 활동을 합니다.”

 Q 조선에 박해가 심했는데도 천주교가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친구들이 부모님께 혼이 나도 자기 마음은 남이 바꿀 수 없듯이 내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국가가 신자를 죽여서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믿지 않도록 무서운 효과를 내는 것은 일시적 인거죠. 억압할수록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서 다시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평등사상으로 신앙 안에서 각자 자신이 소중하고 인간자체로 존엄성을 갖을 수 있는 가르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어요.”

종교의 자유
김대건신부가 유학생으로 마카오에 있을 때 아버지 김제준이 순교를 당한다. 김대건은 아버지의 소식에도 슬픔을 참으며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의 자격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신부님이 해 주신 많은 이야기 중 특히 잊혀 지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종교의 자유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김대건 신부 뿐만 아니라 많은 순교자들의 슬픔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희생을 감사하게 여기고 기억하기 위해 한번쯤 순례길을 걸어 보고 싶다.


계성초 4학년 민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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