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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02.05 10:53
  • 호수 1194

[칼럼]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찾은 민주주의와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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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1987>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당진에서도 지난달 4일 단체관람을 하였는데 영화관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관람하였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것은 이 영화가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전달하였고, 여기에 많은 관객이 호응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진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지난 2018년 1월20일 영화 ‘1987’의 배경이자 역사적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탐방하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민주인사들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얼마나 많은 고문이 일어났는지는 최근 재심을 통해 드러난 수많은 간첩 조작사건이나 민청련 김근태의장 고문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또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의문사가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은 전국의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불법적인 연행, 무자비한 고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 <1987>이 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하여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건축된 내무부 치안본부 산하의 대공수사 기관이었다. 검은 벽돌로 지어진 지상 7층짜리 건축물은 고문을 위해 매우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두꺼운 철문의 여닫음 소리가 주는 위압감을 고려한 정문 설계, 얼마나 올라가는지도 모르게 설계된 나선형의 철제 계단, 5층 취조실의 좁은 창문 등은 고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무자비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되던 흔적을 감추고, 외부와의 단절을 꾀하려는 군사독재정권의 구상이 반영된 것이 분명했다.

영화에서처럼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13일 11시경에 불법으로 연행되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눈을 가리고 차에 태워져 4시간 이상을 돌고 돌다 새벽이 되어서야 남영동 대공분실로 갔다. 건물 뒤편의 작은 뒷문을 지나 5층 취조실로 곧바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서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에 공포감은 더욱 배가되었다. 5층 취조실은 모두 15개로 그 중 509호로 들어갔다.

취조실은 모두 밖에서 전등을 끄고 켤 수 있으며 문마다 안을 감시할 수 있는 렌즈가 달려 있었다. 취조실 안에는 욕조와 수세식 변기, 침대, 고정된 의자와 책상이 갖춰져 있었고, CCTV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취조실의 출입문은 서로 마주 보지 않게 설계하여 문을 열어 두어도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다. 509호실의 고문은 무자비했다. 박종철 열사는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경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에서 끝내 숨졌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6월 항쟁을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외침이 전국에 울려 퍼졌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이제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을 위한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 군사독재정권에서 권력의 하수인이던 경찰청의 선전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주체인 시민이 주체가 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후세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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