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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8.04.13 21:23
  • 호수 1203

[출향인 칼럼] 우리 신화와의 속깊은 만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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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건국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나의 고향은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 전기도 전화도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밤이면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하늘에 별만 총총하던 가운데 산이나 들에 낯선 불빛이 나타나면 다들 그걸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밤길을 가다 도깨비나 여우한테 홀려 길도 없는 곳을 헤매고 다녔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 시절 어린아이들한테 큰 구경거리는 ‘정 읽는 일’이었다. ‘큰 정’이나 ‘작은 정’을 읽는다는 얘기가 들리면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몰려가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거기 가본 적이 없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구남매를 낳아 키우며 갖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의 한 가지 낙이 막내아들 손을 잡고 천주교 공소에 가는 것이었는데, 그 어머니가 “정 읽는 데는 가지 말거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 ‘정 읽는 일’이 굿의 일종인 ‘경 읽기[讀經]’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굿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한국의 전통적 생활문화이며, 그 속에 ‘신성한 이야기’로서 신화(神話)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국어국문학과에서 구비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민간 구전신화는 하나의 별세계였다. 가없는 혼돈 속에서 갈라져 나온 하늘과 땅, 하늘신과 지상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나 저승과 이승의 주재자가 된 대별왕과 소별왕.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원하러 무간지옥을 하염없이 흘러가는 바리데기 바리공주. 적막한 들에서 방황하다 사계절의 땅 원천강을 찾아들어가 시간의 신이 되는 오늘이. 죽은 땅과 죽은 하늘을 살리고 농사의 신 세경이 되는 ‘알파걸’ 자청비. 연못에 훌쩍 뛰어들어서 저승으로 들어가 염라대왕을 이승으로 데려오는 용사 강림도령……. 우리 겨레는 완연한 신화의 민족이었다.

2004년에 민간신화 해설서 <살아있는 우리신화>를 내면서 우리 신들이 보란 듯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썼었다. 그 신령한 서사에 깃든 삶의 철학과 미적 가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예언이 그리 틀리지 않았나 보다. 우리 민간신화를 바탕으로 한 웹툰 <신과 함께>가 일으킨 바람이 영화로 이어져 하나의 태풍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제2, 제3의 <신과 함께>가 속속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미 물꼬가 트인 상태다. 신화 콘텐츠가 대중적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걱정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다. 끝 모를 깊이를 지닌 그 신령한 이야기들이 풍문처럼 스쳐가면서 가볍게 소비되고 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많은 대중이 웹툰이나 영화에 열광하지만, 정작 신화 원전을 찾아 읽으며 음미하는 사람들은 보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 신들의 진정한 귀환은 이루어질 수 없다. 어느 날 그들은 훌쩍 뒤돌아서 사라질지 모른다.

신화는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서 그 뜻을 되새겨 음미해야 하는 이야기다. 그리하면 그 안에 켜켜이 담긴 의미가 새록새록 살아나 우리 삶을 밝혀주게 된다. 예컨대 <바리데기> 같은 신화는 그 깊이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딸이 갖은 고생 끝에 저승의 약수를 길어와 병든 아버지를 살린다는 내용은 얼핏 남아선호사상과 효 지상주의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일 따름이다.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계시적 의미들과 만나 놀라게 된다.

<바리데기>에는 서천서역 저승을 향해 길을 떠난 바리 앞에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가 물러서지 않고 호랑이한테 나아가 길을 열어주기를 지성껏 청하자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변해서 신물(神物)을 전해준다. 무서운 방해자가 신령한 원조자로 변하는 역전. 존재의 양면성이며 인간관계의 이치다.

그때 산신령이 바리한테 준 신물은 바로 ‘낙화(落花)’였다. 왜 떨어진 꽃일까 늘 의아했었는데 근래 이야기를 다시 보다가 머리가 환히 밝아져 왔다. 꽃은 떨어져야만 열매를 맺고 새 생명을 이루는 법. 낙화로써 생명의 길을 여는 것은 이치에 꼭 맞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 저 바리데기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낙화였다. 태어나자마자 부모한테 버림받은 상황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리였다. 낙화에서 생명을 찾은 삶. 그 삶의 힘으로 열지 못할 길이 없다. 이야기는 낙화를 던지면 절벽이 평지가 되고 궂은 물도 육지가 된다고 하거니와, ‘버림을 이겨낸 삶’의 힘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저승으로 들어간 바리데기는 지옥의 가시성과 쇠성에 갇혀 고통 받는 혼령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껏 기원을 올린다. 그러자 가시성 쇠성이 허물어지면서 혼령들이 풀려난다. 바리데기의 특별한 신통력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 대목이 최근 새로운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그래. 누군가 진심으로 고통을 함께 하면서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더이상 지옥이 아닌 거야!” 그렇다. 억만금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도 없이 혼자라면 그곳은 지옥이며,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누군가가 진심으로 함께한다면 그곳은 지옥이 아니다.

바리데기는 뒷날 모든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저승의 신이 된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영혼들 곁으로 간다. 사람들의 슬픈 넋을 위해 모든 자비와 정성으로써 빌어줄 여신 바리데기. 그가 저승에 있는 한 그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고된 삶을 마치고 저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한테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있을지! 꼭 죽은 뒤의 일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바리데기가 깃들어 함께하고 있다면, 이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신령한 생명의 터전일 따름이다.

어찌 바리데기뿐일까. 당금애기, 오늘이, 할락궁이, 강림도령, 황우양씨, 막막부인, 녹디생인…. 수많은 갸륵한 신들이 기나긴 세월을 거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향하여 가는 길, 어렵지 않다. 마음을 열고서 손을 내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신동흔 교수는
1963년 당진시 정미면 우산리에서 태어나 정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한국구비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살아있는 한국신화>,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 <스토리텔링 원론>, <우리신화 상상여행> 등의 책을 썼다. 주호민 작가가 웹툰 <신과 함께>를 창작할 때 신 교수의 신화책을 길잡이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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