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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입력 2019.11.29 09:14
  • 호수 1283

[문화칼럼]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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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 당진나루문학회장

추위를 앞당기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는 표현이 이렇게 어색할까. 이중 덧창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지 사납게 두드린다. 제자리를 지키던 방충망도 혼비백산하여 뛰어내릴 태세다. 붙잡아 주고 싶은 맘 꾹 눌렀다.

태풍 ‘크로사’가 일본을 방문하던 길에 한반도에 들렀다. 강원도 강릉에는 200mm가 넘는 폭우를 쏟아내 펜션을 운영하던 모자(母子)가 실종됐다는 기사가 걱정을 짜낸다. 모자(母子)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펜션 인근 계곡에 설치한 평상을 치우러 나갔단다. 비 피해를 살피러 나갔다가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린 듯하다. 빗물에 핸드폰이 젖을까 싶어 집에 두고 갔다는 기사가 슬픔과 안타까움을 가중시킨다. 사람이 사는 동안 중하게 여겨야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히 내 것일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2010년 9월에 한반도를 관통한 제7호 태풍 '곤파스'의 악몽이 기억난다. 주택이 파손되고 도로변 아름드리 가로수가 천하장사 넘어가듯 뿌리를 허공에 들어냈다. 선산을 지키던 소나무는 목이 부러지고 단풍을 준비하던 벚나무는 이파리를 죄다 털리고 관절이 꺾였다. 혼미한 정신은 10월까지 이어져 연분홍 벚꽃을 가득 피우는 진풍경을 펼쳤다.

우리 집에서도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던 남편과 2학년 학생이었던 작은딸이 우연히 제주도로 각각 수학여행을 갔다. 하필 그들이 돌아오는 날 '곤파스'가 제주비행장을 초토화 시킨 후 33킬로의 속력으로 북상하여 당진에 도착했다. 이번에 방문한 태풍 ‘크로사’는 댈 것도 아니었다. 윗집 베란다 통유리창이 빠지직 찢어지는 소리를 내더니 자기 집 거실로 산산이 부서져 들어가 버렸다. 통유리창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자별하게 지내던 윗집 사람들이 이사를 가버렸다. ‘곤파스’가 쓸어간 것은 과연 통유리창 뿐이었을까.

우리 집 베란다 통유리도 순식간에 고무대야 늘어나듯 배를 불룩 내밀었다. 거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어머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얼른 나가 잡으라고 소리를 친다. 명령에 따르는 기계처럼 판단력을 잃은 채 베란다로 뛰어나갔다가 깜짝 놀라 되돌아왔다. 평소에 평평하던 통유리가 물결무늬를 그리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났다. 괴물을 이기려면 그보다 힘이 세거나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이기려는 그 자체가 도전이 아닌 만용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채근하는 시어머니를 달래어 방으로 들여 보내놓고 멀찍이 떨어져 달리기 잘하는 ‘곤파스’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릉펜션을 운영하던 모자(母子)의 시신을 찾았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 아래에는 댓글이 수도 없이 달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글은 어디에도 없고 계곡에 평상을 깔고 영업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강릉시장이 나서서 근절해야 한다는 비난과 부탁의 글이 쇄도했다. 게다가 사망한 아들은 공무원이란다. 즉 공무원이 불법을 저지르다 아주 작은 이익에 목숨을 걸었다는 비판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신문사든 방송국이든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관계도 없다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사건이 터지면 세상의 이목을 단 한 번에 집중시키는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 옛날의 이목들은 혀만 끌끌 차고 돌아섰지만 요즘의 이목들은 다르다. SNS 등 정보통신망을 달고 있어 쉽고 빠르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그들은 자신은 실천하지 못할지라도 아니다 싶으면 배 터지게 욕을 먹여 국가를 다스리는 법도 바꿀 수 있다. 강릉펜션 모자(母子)의 희생 덕분에 계곡이나 바닷가에 평상이나 파라솔을 펼쳐놓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인식을 단번에 심어줬다. 앞으로 각 지자체장은 사후약방문일지라도 신경 바짝 써야할 중대한 일이다.

나는 옛날의 이목에 요즘의 이목을 삽목한 중간 정도의 수준이다. 잘못된 일에는 옛날 이목처럼 혀를 끌끌 차지만 잘한 일에는 가끔 SNS 등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축하해준다. 화를 당한 강릉펜션 모자(母子)의 사건도 며칠 지나면 이목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신문사나 방송국은 벌써 ‘한강 몸통 시신사건’에 이목들을 끌고 가버린 듯하다.

폭우에 떠내려가는 평상보다 모자(母子)의 생명이 훨씬 중하다는 점을 모를 사람 어디 있을까. 아주 작은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욕심이라는 그놈은 현명하게 살자고 다짐하는 나에게도 소리 없이 찾아들어 무엇이 중한지를 가끔씩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뭣이 중한지 아주 자주 점검할 일이다. (2019.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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