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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명남 목사 별세
“가시밭길 마다치 않은 민주화·인권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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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에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인사 모여
“민주주의·인권·정의·평화·통일이 평생의 화두”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이명남 목사(충남문화재단 이사장)가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이 목사는 지난달 29일 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지난 1일 당진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서는 故 이명남 목사의 고별예식이 슬픔 속에 진행됐다.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주최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목회자들은 물론, 민주화운동 관계자 등이 참석해 고인을 애도했다.

이날 설교를 맡은 대구 노무현재단 이사장 서일용 목사는 “이 목사님의 빈 자리가 감당되지 않는다”면서 “목사님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것에서 위로를 받으며 이제 이 목사님이 남긴 짐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자”고 말했다.

추모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인 정진우 목사와 대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병국 이사장이 낭독했다. 정진우 목사는 “캄캄했던 독재의 시절, 어렵고 힘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목사님을 찾았고, 목사님에게만 힘든 일을 다 떠넘겼으며, 십자가를 질 일이 있으면 목사님을 불러냈다”며 “은퇴하고도 어려운 후배들 사정, 풀기 힘든 고민을 목사님께만 떠넘기고 돈 내라, 시간 내라 졸라댔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그 모든 일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어려운 문제나 손해나는 일이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문제라면 언제든 흔쾌히 떠안아 주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교단주의는 목사님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면서 “남·북의 벽도 허물어 북녘동포들을 돌보는 일과, 한·일 간의 벽도 허물어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문제에 누구보다 앞장섰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인권, 민주주의, 정의, 평화, 통일, 지방자치 등 우리사회가 가진 문제 앞에서 이 목사님은 언제나 단단한 몫을 해주셨다”며 “우리는 목사님을 참 좋은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김병국 이사장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몸으로 항거하던 청년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던 후배들에게 항상 큰 힘이 돼주셨다”면서 “청년들이 연행되고 감옥에 끌려가도, 독재타도라는 명분과 목사님의 헌신적인 선두투쟁과 격려 때문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초 당진에서 대전까지 왕복 7시간이 걸렸던 시절에도 이 목사님은 먼 길을 오가며 민주회복투쟁을 함께했다”며 “이 땅에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살아오셨다”고 추모했다. 이어 “고단했던 삶을 이제는 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길 바란다”며 “후배들이 목사님의 정신을 계승하며 이끌어가겠다”고 덧붙였다.


예수의 삶을 좇은 목회자, 사회 위해 온몸 바친 운동가

목회활동부터 사회운동, 지역사회 일까지 
대통령 표창 및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투쟁 고통스러웠지만…평생 빚진 죄인이다”

故 이명남 목사는 평생을 목회자로 살면서도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와 평화,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친 운동가였다.

지난 10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그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인권이 버림받은 삶의 자리에서 동지들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했다. 눈치 보지 않고 옳은 것에 ‘예’하고 그른 것에 ‘아니오’ 했다. 돌아보니 감사한 일들이다”라고 썼다.

고인은 1941년 태어나 유년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교회를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군복무를 마친 뒤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1972년에 옥천 동이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해 1980년 당진교회에 부임, 지난 2011년 은퇴했다.

농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농민운동을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故 이명남 목사는 김근태 고문은폐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물론 전교조 창립과 탄압 과정 등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통일운동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현안에도 적극 참여하며 당진군 시승격과 당진평화의소녀상 건립 등에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고인은 지난 2005년 대통령 표창, 2009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지난 10월 회고록 <인권, 온몸으로>를 출간하면서 “1980년대 군사독재 정권과 싸우는 일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늘 경찰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그 덕분에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할 수 있었다”면서 “바르고 투명하게 살고자 했고, 그 덕에 당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암울한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저는 빚진 죄인”이라며 “수많은 분들에게 진 빚을 갚으면서 여생을 살고자 했지만, 또 이렇게 빚을 진다”면서 자신을 낮췄다.

회고록을 발간한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의 이사장인 권호경 목사는 “이명남 목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 태동기와 6.10민주항쟁을 거쳐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하기까지 현장을 지켜온 증언자였다”며 “이명남 목사의 회고록은 1980년 이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이명남 목사는…

-1941년 대전 출생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1980년 당진장로교회 부임(31년 간 사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한국교회 인권센터 이사장
-기독교사회운동연합 의장
-한국사형폐지운동연합회 공동위원장
-전국목회자정의평화운동실천협의회 상임의장
-재일동포인권선교위원회 위원장
-민주화운동관련 명예회복분과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민주주의·민족통일 대전충남연합 상임의장
-당진시승격 추진위원회 위원장
-충남환경운동 상임의장
-지방분권운동 충남지부 공동대표
-당진평화의소녀상 기념사업회 상임대표
-당진문화재단 이사장
-충남문화재단 이사장
-당진YMCA 고문
-당진시대신문사 윤리위원장
-2005년 대통령 표창 수상
-2009년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출판 회고록 <인권, 온몸으로> 출간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특별한 기억”

김지철·최교진 교육감 및 이인호 교사 등 애도
온라인 SNS에서도 추모 물결 이어져

故 이명남 목사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서 빈소는 물론 온라인 SNS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목사를 추모하며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다.

양승조 충남도지사는 “우리가 존경하는 이명남 목사님이 운명하셨다”며 “암울한 시대에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던 목사님! 삼가 명복을 빈다”고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전교조 출신 김지철 충남도교육감은 이명남 목사의 소천을 알리며 “1989년 전교조 창립 준비 중 전국 최초로 구속됐을 때 면회 오신 이후 제가 늘 존경해 온 충남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거목, 이명남 목사님”이라며 “안식을 기원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추모했다.

뿐만 아니라 최교진 세종시교육감 또한“이명남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며 “부음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고 운을 뗐다. 그는 “1985년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민청)을 만들어 재야운동을 시작한 뒤, 함께 출발한 충남민주운동협의회(민협) 의장을 맡아주시고 김순호 신부님과 함께 대전충남 지역 운동가들의 큰 어른 역할을 하셨다”면서 “80~90년대 충청지역의 모든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교육운동의 투쟁 현장에 목사님이 계셨고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주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지역을 넘어 전국 기독교의 인권운동, 통일운동, 농촌목회운동에도 앞장서 후배들의 길잡이가 돼주기도 하셨다”며 “하늘나라에서 평안과 평화를 누리시되 자주, 민주, 평화, 통일의 그날까지 우리들이 첫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힘을 달라”고 기원했다.

전교조 당진지회장을 지낸 이인호 교사는 “이명남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당진에 문상 다녀왔다. 교육민주화운동이 탄압받던 시절, 당시 당진에서 부부 해직교사였던 우리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시고 함께했다. 전교조 행사를 위해 교회를 빌려주시고, 기관원들이 골목을 지킬 때 창립대회 장소로 제공하셨다. 전교조가 지역민주단체와 결합하는데 큰 힘이 되어주셨다. 충남 뿐만 아니라 전국을 누비며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다.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영정 앞에서 오랜만에 뵈니 너무나 죄송하다. 목사님의 명복을 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편히 쉬소서!”라며 이명남 목사를 회고했다.
 

[추모시]

시골목사 이명남

서덕석 (목사·시인)

태안반도 초입 당진읍에 당진장로교회가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세워져 65해를 맞은 시골교회이다
39살에 8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간 이명남 목사는
새벽기도회 인도하랴, 송아지 낳은 교인네 찾아가 기도해 주랴, 
일하다 다쳐 드러누운 교인 손잡아 주랴,
동네방네 일이라도 생기면 얼굴 내미는 등
주일날 예배 외에도 밑도 끝도 없이 일이 닥치는
시골교회를 목회 하느라 인생 절반을 보냈다

그 와중에 매주 한 두 번씩은 서울과 대전으로
출근하듯 하면서 교회 밖을 섬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오지랖 넓고 팔자가 늘어져서가 아니라
쓰러진 이 손잡아 주고 아픈 이 등 두드려 주다보니
그게 어느 새 당진 읍내를 넘어서서
대전·충청으로 그 예 서울바닥으로 멀리까지 간 거다

하나님이 일손이 달려 햇볕에 얼굴 검게 타고
신발에 흙 묻은 시골마을 목사라도 불러서
이 땅이 민주화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고 하신 거였다

훤출한 키에 미남형으로 잘 생긴 시골목사 이명남이
휴일인 월요일과 기독교회관 목요기도회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대전이나 서울행 버스에 오르면
당진 터미널을 지키던 버스운전사 양반들이
“단골손님 이 목사가 있어 우리 회사는 좋고
이 목사 덕분에 나라가 폭삭 망하는 꼴은 면하는가 부다”
할 정도였다

교단과 학벌, 파벌이 거미줄처럼 얽혀 복잡했던
기독교운동판에서 이명남 목사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수파로 자처하며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맨 앞자리를 말없이 지켰다
시골목사 이명남이 그저 꿰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님을
증명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릿수하나 하나 아쉬웠던 판에
일찌감치 새벽기도를 마치고 올라와
약속시간 전에 맨 앞자리를 차지한 이명남을
빼 놓고서 운동이랍시고 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시골목사 이명남의 운동론은 오직 예수의 사랑과
신의와 성실이 전부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리가 싸우는 저들마저
보듬어 안고 미워하지는 말자는 거였다
그의 쉬지않는 실천 앞에서 차이와 차별과 경계가
허물어져 나갔다
그의 민주화운동을 극렬 반대하던 몇몇 교인들도
결국 막은 길을 열고 비켜 줄 수 밖에 없었다

80~90년대 한반도 민주화운동의 줄기 찬 흐름에
온 몸을 내 맡긴 시골교회 이명남 목사는
그 모든 순간들을 바라보고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 아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여,
이 사회를 구원하시려거든 먼저 민주화 되게 하시고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거든 통일되게 하소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으로 불려 간
시골목사 이명남은 뚜벅뚜벅 당진을 벗어나서
철책선으로 가로막힌 한반도를 가로질러
그와 함께 울고 웃고 춤추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어느새 하나님 앞에 다다랐을 거다
온갖 잡탕 엉터리 목사들이 설치는 대한민국에서
시골목사 이명남, 그는 진짜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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