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9:24 (금)

본문영역

[사진속으로 추억속으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남편
최병문·인정복 부부 (신평면 신송1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혼식 맞절하며 처음 본 신랑 얼굴
주민들과 야유회 다녔던 그리운 시절

지금은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노인이지만,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다. 최병문 씨가 21살 때, 아내 인정복 씨가 19살일 때 결혼했다. 남자는 신평면 신송리에서 나고 자랐고, 여자는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땐 어른들이 맺어주는 대로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식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어른들끼리 사진을 주고받았는데 나는 안 보여 주는 거야. 감히 사진 좀 보여달라고 말도 못하던 시절이었지. 벽장 안에 숨겨 둔 사진을 내가 몰래 꺼내봤지. 괜찮더구만.” (아내 인정복 씨)

결혼식 때 서로 맞절을 하면서 흘깃 쳐다본 게 처음이었다. 그렇게 70년을 살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부부싸움 한번 한 적이 없다. 아내가 다 맞춰준단다. 남편도 그런 아내가 고맙다.
“피죽 쒀먹고, 스슥(좁쌀의 사투리)으로 인절미 해먹던 어려운 시절 시집와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 효부상을 탈 정도였으니까. 사랑으로 산 거지, 뭐.” (남편 최병문 씨)

1·2번 사진
결혼을 하자마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터졌던 때다. 최전방 3사단(백골부대)에서 근무했다. 화천·연천 등이 근무지였다. 23살 첫 휴가를 받은 뒤 나와서 아내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당진시여성단체협의회가 주관하는 행복 금혼식에 참여해 65년 만에 리마인드 결혼식을 올렸다. 남이섬으로 신혼여행도 갔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게 화살처럼 지나갔다.

3번 사진
남편 최병문 씨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참전유공자다. 결혼 직후 1951년에 입대해 1955년에 제대했다. 당시 신평면에서 26명이 참전했는데, 전장에서 죽은 사람도 있고, 고향에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현재는 3명만 살아 있다. 어린 청년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상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잔인한 세월이었다.
“북한군이 개처럼 보였어.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총을 쏠 수 있었지, 사람으로 생각하면 못할 짓이지.” (최병문 씨)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떠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 당시 신송국민학교(현재 신송1리 마을회관 자리)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환영회를 해줬다. 주민들이 박수를 치고, 꽃목걸이도 걸어주면서 환영해줬다. 그 기억이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뒤로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당진시지회 회원으로, 그리고 신평면분회장으로 활동해 왔다. 사진은 지난 2010년에 회원들 및 봉사자들과 평화·안보기행을 떠났을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 여든 살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오토바이를 타고 신평에서 당진까지 오갔을 정도로 건강했다.

4·5번 사진
언제 어디에서 찍었는지도 모를,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진이다. 70년대 당시 신송리 마을 사람들과 야유회를 갔던 것 같다. 당시 최 씨가 동네 친목회장이었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종종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사진 속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딱 한 명만 살아 있다. 그리운 얼굴들이다.

6번 사진
1991년도에 가족들과 여행을 갔었다. 어디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자녀들은 모두 인천에 살고 있다. 화순, 영순, 용묵, 옥순, 미순, 창묵 6남매가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잘 자라 효도하며 지낸다. 자녀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매일 그렇게 기도한다.

>> 최병문 씨
-1930년 신평면 신송리 출생
-전 농업기반공사 수감(물관리)
-전 신송1리 노인회장
-현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신평면분회장

>> 인정복 씨
-1933년 우강면 송산리 출생
 

저작권자 © 당진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5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