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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이흥석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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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대들던 호연지기 어디가고...

이흥석 할아버지

일본인에게 대들던 호연지기 어디가고...
종교생활 열심
성당계단 수없이 오르내려
“죽다 살아났으니 이제 남을 위해 살자 마음 먹었는데 이렇게 병신이 되어 남의 신세만 지게 되었구랴”

“십여년전 죽을 목숨인데 다시 살아났지요. 그때는 다시 태어났으니 죽는 날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져 마음 속으로 몇십번 다짐을 했었는데 이렇게 병신이 되었으니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의 신세만 지고 살게 됐어요. 정말 안타깝군요”
금년 나이 70세인 이흥석 할아버지는 십여년전에 중풍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구합덕성당의 프랑스인 백신부의 정성어린 간호로 목숨을 다시 얻었으나 반신불수로 팔과 다리를 못쓰는 장애자가 되었다.
젊어서는 성미가 꽤 칼칼했음직한 이흥석 할아버지.
그는 합덕리 넓은 들판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았다. 처자식하고 이십여년전에 서야고등학교 정문앞에 옹기종기 추녀를 맞대고 부락을 이루고 있는 십여채의 집 중 제일 큰 집으로 이사를 왔다. 삼십여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려고 논 한섬지기도 샀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이 되는가 싶더니 부인이 산후에 얻은 자궁암으로 배에 물이 차서 해산전보다 더 배가 불러 유명하다는 병원이나 한의사를 찾아다녔으나 결국 3년동안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떴다. 꼭 이십년전의 일이다.
남쪽가지 꽃피고 북쪽가지 차갑다.
그렇대서 봄 마음 두갈래라 하는가.
하나의 이치 가지런히 분별없거니
이내몸 깊숙이 보살펴봄이 어떠리.
세종대왕시대에 신동으로 유명했으나 허름한 가사를 몸에 걸친 거지중으로 세상을 반항적으로 유랑하고 살다가 부여 무량사에서 열반한 김시습의 시구절이다.
이흥석 할아버지는 십칠세의 어린나이에 혼자서 일본의 도쿄로 건너갔다. 그때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어수선한 시국에다 일제식민지의 학정이 극점에 다다랐을 때였다. 면사무소에 가서 일본행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달라고 신청서를 내니 일본인 면서기가 조선인은 안된다고 큰소리로 호령을 했단다.
그래서 이흥석 소년은 더 큰소리로 대항했다 한다. “나는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해 아는 것은 없으나 당신들이 그렇게 살기좋고 근대적인 도시라고 자랑하는 도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라고 대들었더니 2개월 기간의 여행
증명서를 발급해 주더란다. 그런 호연지기가 있는 소년이었는데 지금은 이빨이 다 빠져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노인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그때 어린나이에도 일본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여 2개월간 도쿄에 있는 설탕공장에서 날품팔이를 하면서 구경을 하고 고향에 되돌아 왔다.
그로부터 객지생활에 막노동판으로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금광에서 광부로, 강원도 산꼴짜기에서 철도 기반공사의 막일꾼으로, 안동댐의 인부로, 전국 어느 곳에서나 큰 공사가 벌어졌다 하면 그곳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큰 돈도 벌었다. 한동안은
공사판에서 일한 뒤 부모님 계신 곳에 올때면 푸대에 돈을 가득 넣고와서 논도 사드리고, 밑으로 칠남매인 동생들의 학비며 그외 돈을 쓸곳은 전부 이흥석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동생중 박사(의사)도 있고 대학교수도 있다고 하시는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입을 다무신다. 오늘의 당신의 꼴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음을 마주앉은 기자에게 암시하는 듯하다.
오십대의 연세에 홀아비가 되어 삼남매를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딸은 그럭저럭 출가를 시켰는데 큰 아들은 이모가 데려다가 키웠고, 막내 아들은 국민학교 3학년때 가출했다. 몇년동안 가출한 막내를 찾아나섰으나 헛수고로 그쳤다.
부인 죽고 자식들과는 생이별을 하였으니 그 마음인들 어떠했겠는가? 화병으로 신음하다 결국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그후 이흥석 할아버지는 논과 집을 팔아 부인 병원비 대고 자식놈 찾으러 다니느라 돈을 다 써버리고 남은 돈으로 겨우겨우 지금 살고 있는 단칸방으로 오년전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흥석 할아버지의 단칸방 문을 열고 보면 구합덕성당의 쌍종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나 눈만 오지 않으면 한손에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면서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수없이 밟았단다. 아마도 생사를 모르는 자식들의 건강과 그들의 성공과 행복을 빌면서 오르고 내렸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또 그 계단을 오른다. 자식들의 행복을 가슴속에 품으면서.

서금구/당진시대 객원기자
합덕대건노인대학장
(0457)363-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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