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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구의 사람아 사람아-군의회 전문위원 박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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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 눈물 닦는 일 30년

군의회 전문위원 박원신

가난한 사람 눈물 닦는 일 30년
정년 1년 앞두고 후진위해 퇴임하는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시인 윤동주는 20대 후반의 젊은나이에 “독립운동”이란 죄목으로 일본땅 후꾸오까 감옥에서 옥사를 했다. 그는 불길과 같이, 타오르는 혼을 다하여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으로 노래를 읊고 읊다가 순절(殉節)하고 말았는데 50여년의 긴세월이 흘렀어도 오늘의 사표(師表)로서 길이길이 남아있다.
일찌기 도산 안창호선생도 이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국을 누비면서 강연을 할때마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정의
는 반드시 이룩될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모두 윤동주와 도산의 큰 업적을 깊이깊이 가슴에 새겨 오늘에 되살리면서 살아가야할 것이라 생각된다.
6월 20일 명예퇴임하는 전 당진군의회 전문위원(별정직 5급)인 박원신(60세)씨는 정년을 1년 앞두고 후배 공무원들의 앞을 터주기 위해 퇴임해 귀감이 되고있다.
박원신(朴元信)씨!
박원신씨는 합덕읍 소소리에서 출생하여 합덕국교와 합덕농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직에 뛰어들어 합덕읍에서 서기로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하게되니 합덕의 알짜 토박이인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는데 어려웠던 당시의 나라살림과 가난하게 살고있던 농촌문제에 큰 관심을 갔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공직자가 할일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다.”라는 인도수상 네루의 명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지금까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고 술회한다.
흔히 우리는 정치나 경제가 인간애(愛)와는 상관이 없는것 같이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정치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빠지면 결국에는 독재와 억압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고 또한 경제에서 인간애가 빠지면 결국에는 탐욕과 수탈밖에 남는것이 없다. 그럴때 이런 정치와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들을 한낮 도구로 전락시키고, 사회전체는 몰락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과거에 느꼈고, 경험한 바 있다. 이런 결과로 많은 양심있는 사람들이 감옥의 신세를 지게되었고 양심수라는 낱말이 만들어졌으며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그리고 경제인들이 부정한 방법과 부도덕한 수단으로 어마어마한 재물을 축척하였던 과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박원신씨는 1963년 지방공무원 9급으로 시작하여 합덕읍, 정미면, 고대면, 우강면등을 두루 거쳤다. 하위직이라 자신의 창의
력은 발휘하지 못하였으나 언제나 농민들 입장에 서서 해결하고자 했고, 그들편에서 그들과 함께 걱정하고 돕기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공직자는 농민들 편에 서서 그들에게 필요한 봉사를 해야함은 물론이려니와 어떤식으로든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체험중에 어려운 사항은 함께 나누고, 함께 겪으면서 그들에게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야 공직자의 올바른 사명이며, 자세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농민들이 고루 잘 살도록 하는 지름길이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과의 격차를 자꾸 줄여나가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에 각자의 목표를 향해 한걸음 앞으로 가는 것이 희망이며, 바램인 것이다. 그러
나 살기어려워, 자녀교육 때문에 농촌을, 즉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이농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반만년동안 우리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터전이 농촌이며 우리 얼이 담긴 곳이 농촌이고, 우리문화의 모태가 농촌인 것이다.
박원신씨는 이런 농촌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직자로서 자신의 힘의 한계를 절감해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힘있는 사람들과의 텔레파시 교감 없이는 아무일도, 아무의견도 낼 수 없었으며, 승진이나 좋은자리(?)에는 더구나 앉을수 없는 정치적인 상황이 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오직 근면과 업무의 완성으로 일관했던 그는 13년이란 긴세월이 지나간 후부터는 순성을 시작으로 부면장 자리로 옮겨 농민과의 친교를 더욱 굳히게 되고,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지방행정 발전의 큰 기틀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평과 면천의 부면장을 거쳤다.
박원신씨는 정상적인 수준으로 웃자리가 마련될지라도 “난 아직 나이가 있으니 선배가 먼저 그자리에 앉아야 되지않겠느냐”
고 양보한 일이 여러차례 있었다. 그래서 겉만 보고 그를 무능하다고까지 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것이다.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을 때는 모든것을 다 좋게좋게 해결하라고 말을 하지만 막상 자기와의 이해관계가 있을때 그것에 선뜻 동의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퍽이나 드물며 또 그런만큼 힘들게 처리되는 것이 항례인 것이다.
공무원 생활 20년이 넘어서 외청의 근무를 끝내고, 본청인 군의 보건행정계장, 위민실장, 서무계장, 국토미화계장, 건전생활계장, 그리고 통계계장등 중요부서의 실무책임직을 6년동안 맡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보람있었고 더욱 열정을 낸 곳은 위민실장을 맡아 봉직할때라고 말한다.
초대 위민실장을 맡고서는 민원을 상대로 그들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듣는 일이 태반이었는데 주로 영세민들의 사정을 들어주는 상담역과 해결사였다고 한다. 행정적으로 즉석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해결해주고, 또 유관부서와의 협조사항이 있으면 그 과와 함께 해결해 주고, 이것도 저것도 어려운 문제가 있을 책는 직접 군수와의 상담으로 해결들을 모색했었다 한다.
이렇게하여 많은 어려운 민원을 처리하였을 때에 민원실장으로서의 보람과 기쁨이 가장 컸었다고 술회한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더라도 사람됨에 있어서 부족할 때는 그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부도덕할 때는 말할것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분명히 정직하고 성실하며 도덕적일때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며, 특히 공무원일때 더 큰 존경을 받게 되는것이다. 바로 이런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때가 위민실장으로 있을때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늘날 세상이 안고있는 가장 큰 병은 버림받고, 소외되고, 가난하게 살고있는 사람의 수가 자꾸자꾸 늘어가고 있는 점이다.
현재는 의학이 발달해서 전에는 고치지 못하는 병들도 고칠 수 있고, 치명적이라는 암도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사회에서 필요로 하지않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병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자기는 모든사람에게 쓸모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나락으로 빠져드는 「소외감」이라는 큰 병은 고치기 어려우며 약으로, 병원에서도 쉽게 고칠수 없는 것이다. 이런 병에 걸린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은 인간의 따뜻하고 훈훈한 사랑과 서로간의 대화라는 약 뿐이다. 대화로 처방하고 인정의 손길이 닿으면 쉽게 고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먹고 사는데 저마다 바쁘게 뛰어다닌다. 그러나 돈많이 벌어서 잘먹고, 잘입고, 좋은집에서 산다고 정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을 이웃에서 흔히 볼수 있다. 돈 있는 사람들일수록 과소비하면서 생활하지만 마음의 만족을 얻지못하고 어떻게 할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음을 안다.
박원신씨는 91년 7월 초대 당진군의회 전문위원이 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30여년동안 휴업하고 있다가 새로 시작하는 기관임으로 경험자가 없어서 혼자서 연구하고 책으로 공부하며 국회의사당으로 또는 전문직 교수들을 만나서 보고 배우고, 또 기록하여 군의회의원들에게 알려주며 같이 연구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랐다고 박원신씨는 말한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우수한 군의회로 찬사와 공로가 돌아갔던 것이다.
박원신씨는 공직생활 31년간의 긴여로에서 일관성있게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갖고 모든 군민들에게 차별없이 대하고 공직에 임했으며, 외유내강의 자세로 자기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간략하게 얘기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관직에 있는 공무원 상, 하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무관심이나 나혼자만이 살아남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사람들의 문제를 자기문제와 똑같이 온몸으로 끌어안고 해결하고, 처리함에 모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원신씨는 이제 오랜 공직생활에서 명예퇴임을 하였다. 그러나 아쉽다면 아직 더 일할수 있고 또 완숙된 행정능력을 가진 사람에다 건강하고 다부진 체격을 소유하고 있다. 31여년의 공무원 생활의 경륜과 경력, 그리고 그만이 갖고 있는 노하우가 있지않겠는가.
퇴직후의 그의 행보에 대해 말한적도, 들은적도 없지만 그는 합덕신협의 이사로서 17년간의 긴 봉사활동으로 지금은 자본금 170억원과 조합원 5천명의 대형조합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밑거름 노릇을 하였다. 또한 30여년의 천주교 신자생활로 신합덕천주교회 레지오마리애의 꾸리아 단장으로서 신심생활에도 경지를 높이고 있다. 군의회를 오늘에 발전시킨 장본인도 전문위원이 아니겠는가.
위의 것중 하나를 택해 초야에서 생활할 것인지, 아니면 어떤것의 두가지를 겸하면서 마지막 생의 영광을 입고 더 좋은 사회생활에 몸을 투신하겠는지는 본인외에는 아무도 모르고있다. 그러나 바라는 바는 어떤일에도 자기의 소신을 분명히 밝히며 뜻을 펴서 더 밝은사회, 더 좋은 단체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합덕읍민들이 바라는 바이며 박원신씨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서금구 / 본지 객원기자
합덕대건노인대학장 <0457>363-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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