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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20.09.14 15:19
  • 호수 1323

[당진의 유제 군수 이야기 5]
유제는 누구인가? 유제 신앙사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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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완 당진시 기독교역사문화교육위원장 / 탑동감리교회 원로목사

1. 한국 양반계급의 초기 신앙인

한국인이 개신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 갖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1880년대 초부터였다. 대체로 1880년대 한국 개화와 관료지식인들의 개신교 수용태도는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즉 유교를 버리지 않으면서 개신교를 관용한 입장, 불교를 믿으면서 개신교를 포용한 입장, 그리고 전통적 종교를 부정하고 개신교에 개종한 입장들이다.

조선왕조 내 개화파 관료지식인들은 개항 이후 조국의 ‘개화(開化)’와 ‘부강(富强)’을 모색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개신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유교적 입장에서 입각한 개신교 수용자들은 개신교를 미국이 부강하게 된 정신적 지주로 간주하고 조선의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미국 선교사들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유제는 이미 기술한 것처럼 고종황제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을 정도로 조정에서 인정받는 젊은이였다. 그는 이미 조정을 드나들며 초기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정동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먼저 수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후에 정동교회 최병헌과 박환규 등 정동교회 사역자들을 초청하여 덕산 한내에서 전도 강연을 시도한 것은 초기 정동교회 교인들과 특별한 관계에서 이루어졌음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유영익은 그의 논문 <젊은날의 이승만>에서 “1897~1898년 간에 양반 출신으로 여겨지는 현직 관료 중에서(…생략…)면천군수 유제, 죽산군수 김홍수 등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현직에서 기독교적 생활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제가 초기 기독교 신앙을 접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조정안의 여러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정으로부터 제수된 벼슬은 분감교역관(1890.10.9.이전/종9품), 분교관(1892.9/종9품), 돈녕부 도정(1893.3.18./정3품), 부호군(1893.3.19./종4품), 면천지역 선유별관(1894년), 면천군수(1895.6.18. ~ 1896.10.14.)를 지냈다.

그가 1895년 면천군수로 재직하기 휠씬 이전에 기독교 신앙을 접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음은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하다. 1892년~1893년에 무곡한 쌀을 면천 등지 10여 고을에 무상으로 나눈 선행이라던가, 선유별관(1894년)으로 이웃을 구휼한 일 등이다.

군수 재직시절 유제의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각 처에서 석비를 세워 유제의 은덕을 칭할 정도의 치적은 그의 하나님 공경과 이웃 사랑의 발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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