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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 입력 2020.09.19 16:59
  • 호수 1324

한국 양반계급의 초기 신앙인
당진의 유제 군수 이야기 5 유제는 누구인가?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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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완 당진시 기독교역사문화교육위원장 탑동감리교회 원로목사

아펜젤러 선교사의 선교보고에서 유제가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전해진 것보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아펜젤러가 미 감리교선교부 레오나드(A.B,Leonard) 목사에게 보낸 1889년 4월1일 선교보고에서 ‘유형제’와 사역한 보고서가 미국 드루대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고 쓰여있다. 아펜젤러가 말한 ‘유형제’는 유제가 개화기 기독교 선구자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아펜젤러의 보고에서 그들은 주일학교를 통하여 설교도 하고 밤에는 부인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아펜젤러와 남쪽지역 가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은 유제의 당시 행적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정동교회를 통하여 예수복음을 받아들여 당시 지식인으로 신학문을 받아들인 유제의 복음행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신앙인

유제의 행적을 통하여 배워야할 것은 그가 신앙과 생활이 일치된 기독인의 삶, 즉 그의 이웃사랑 실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11월3일 자에 그의 선한 행적이 기사화되었다. 유제는 1892~1893년경 쌀을 무곡하러 내포지역에 도착한다. 당시 구만포는 내포지역의 곡식을 수도권으로 운송하는 배들로 인해 큰 항포구를 이루고 있었다. 유제도 구만포를 통해 내포지역 곡식을 한양으로 수운하려는 계획으로 백미를 매곡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심한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유리하고 있을 때 유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근본신앙을 실천한 것이다. “덕산 거하는 전 면천군수 유제는 근본 서울 사람으로 천성이 인선하고 마음이 온유한데, 사오년 전에 쌀을 무곡 하고져 하여 내포 등지로 갔더니 흉년을 당한 백성들이 유리함을 보고 불쌍히 여겨 수십만량 무곡한 쌀을 흩어 내포등지 십여골에 거민을 주었으며”라고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수십만량이란 금액은 당시 백미 한석이 다섯량 임을 감안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나눔이다.
또한 그의 이웃 사랑의 정신은 그 후에도 나타났다.

갑오년(1894년)에는 “갑오년 동란 때에 선유별관 하여 또한 사람을 많이 살린지라”라고 기사화되었다. 이러한 유제의 행적에 감동 받은 지역 주민들이 “그런고로 열읍 백성들이 내부에 청원하여 면천군수를 하였으며 석비를 각처에 세워 유제의 은덕을 칭송하더니” 라고 조선그리스도인회보는 기사화하고 있다.

유제의 자비로운 신앙행적은 지역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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